[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1년 전 여름, 오빠와 나, 그리고 조카는 낯선 나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나 이름을 들어본 나라. 해발 5000m가 넘는 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이 세 나라를 일컬어 코카서스 3국이라 부른다는 거, 뭐 이 정도가 그 나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 중에 조지아는 인류 최초로 와인을 만든 나라라는 오빠 말에 왠지 귀가 솔깃했다. 술 좋아하는 나와 뭔가 인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조지아는 코카서
[위클리서울=이석원 기자] 1990년대 중반 스웨덴 굴지의 기업 에릭슨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칼 피에르손 씨는 대규모 구조조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칼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어차피 2년간 80%에 해당하는 월급이 2년간을 지급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40대 중반이기에 이직을 위한 준비를 했다.그러던 중 칼은 평소 좋아하는 베트남 음식 만드는 일을 배웠다. 가족들에게 해주기 위해 취미삼아 배운 일이었는데, 칼은 자신이 음식 만드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는 가족과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또 제주다. 17년 여름에도 제주를 다녀와 이곳에 글을 썼는데, 올해는 봄도 여름도 아닌 날 제주에 다녀왔다. 다만 휴학을 하지 못한 4학년이 되었기에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2박 3일로 짧은 여행이었다. 시험이 끝난 주간도 아니었는데 왜 일정을 욱여넣어 먼 바다의 제주로 떠났을까. 세 편에 걸쳐 그 이유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세번째 이야기다. 오름에서 친구가 돌아왔다. 게스트하우스의 쿠킹클래스에서 이어진 작은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친구는 뒤늦게 참석한 것이 무색하게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며 즐거운 분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은 며칠 전부터 신경 쓰이고 부담이 된다. 어떤 옷을 입을 것인지 신발은 무엇으로 신어야 어울릴지. 액세서리는 과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본다. 수업준비도 몇 번의 연습과 되풀이 반복을 하면서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고 노력한다.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옥죄어 올 때도 있다. 웬만큼 해서는 그들의 눈길 한 번 받기도 어렵다. 잘 쳐다보지도 않는 그들, 얘기를 해도 답이 없는 그들,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떨 때는 벽을 보고 수업을 하는 것 같기도 한 그들은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엄마는 내 이빨이 참 골치 아프다고 했다. 토끼처럼 앞니 두 개가 톡 튀어나와 있어서 보기에 따라선 귀여울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학창 시절에 그 누구도 내 이빨을 가지고 놀린 친구는 없었다. 오히려 내 머릴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는 있었다.“뭐야. 왠지 토끼 같잖아!”그럴 때면 나는 앞니 두 개를 입술 밖으로 꺼내 물며 토끼 코스프레로 아이들을 웃겨주곤 했다. 그러니 나에겐 이빨 열등감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나에겐 이빨 열등감을 심어주려는 엄마가 있었다.“너 그거 빨리 교정해서 보철기 껴야된다.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내 나이 38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정적인 한국생활을 뒤로 하고 타국에서 하루아침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준말) 신세가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아프리카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이라는 나라,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38살 아줌마의 중국 체험기, 지금부터 시작해본다. 요즘 젊은이 치고 배달음식 앱 ‘배달의민*’이나 ‘요기*’를 한번쯤 이용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전화주문하던 시대를 지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별 브랜드의 앱을 이용한 주문이나 웹 주문까지만 해도
[위클리서울=이석원 기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난제라는 것이다. 우리 역사는 지난 수 백 년 간 이 말을 전가의 보도로 여기며 살아왔다. 나라님도 구제 못하는 것이니 스스로 구제하든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살아가든지.그런데 스웨덴 사람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면 고개를 갸웃 거린다. ‘가난을 나라님이 구제 못하면 누가해? 다른 건 몰라도 가난은 나라가 구제해주는 것 아냐?’라며.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가난해질 수 있는데 그 가난을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 또는 국가
57.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로스 쿠에르노스를 떠났다. 텐트를 접을 필요가 없으니 짐을 챙기고 떠나기 훨씬 쉬운데다가, 칠레노 산장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었다. 다음 새벽에는 토레스 삼봉에 올라 일출을 보기로 하는 일정이었기에 일찍이 도착해 텐트를 치고 푹 쉬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튿날이 되니 가져온 음식의 양이 줄어, 들어야 할 짐도 한껏 가벼워졌다. 문제는 길이 점점 더 험악해진다는 것이었다. 전날 길을 잃어 고생한 기억에 우리는 몇 번이고 지도를 펼쳐보며 가야할 길을 신중하게 확인했다.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던 늪지대가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었던 친구가 호르몬 약을 평생 먹고사느니 하고 싶은 것 실컷 해보다 죽겠다며 약을 끊었다.“그러면 안 되지 않을까?”“너라면 그 독한 약에 니 몸이 쩔어가는데 계속 먹고 싶겠니?”학교 선생님이었던 그 친구는 학교까지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지 맘대로 살기’에 돌입했다.그 첫 번째가 도자기 만들기였다.“같이 배울래?”“그런 거 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그래 그럼. 넌 평생 돈돈하다 죽어.”아니, 이런 싸.가.지.를.봤.나. 그래, 팔자 편한 년은 어떻게 노나 구경이나 해보자 싶어 무작정 따라나섰다. 그런데 거기서
14년 전 2005년 처음 스톡홀름에 왔던 게 딱 이맘 때 쯤인 7월 중순이었다. 한 여름의 스톡홀름은 찬란한 태양과 새파란 하늘, 가끔 무리를 지어 떠다니는 구름으로 최고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하늘빛을 그대로 담은 멜라렌 호수는 눈이 부시도록 파랗게 빛났고, 도심을 뒤덮은 공원들은 짙푸른 녹색의 향연이었다.하지만 섭씨 35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날씨는 더웠다. 그 폭염 속에서 이상한 것은, 버스며 지하철 그 어디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역 어디에도 에어컨은 가동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햄버거 가게나 카페에서도
그 날은 아침부터 전운이 감돌았다. 아니, 전운은 사실 몇 일전부터 감지되었다. 사람들은 흥분되어 있었고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승리에 대한 불타는 투지와 손자병법보다 더 우월한 전술에 대해서 침을 튀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물가와 경기 불황으로 살맛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들은 모처럼 활기를 띄었고 전장에 나간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날은 U-20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날 축구 경기는 정말 미웠다. 기말고사를 코앞에 앞둔 아이들은 책을 펴 놓고 있긴 했지만 이미
어린 자식이 부모를 집에서 쫓아낸 사건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을 잠궈버린 것이다. 어찌 살았기에 자식한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노는데 미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맞다. 놀고 싶었다. 나도 남편도 그것 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 대안학교는 부모 모임이 조금 유별났다. 동네 닭집 하나를 거의 먹여 살리다 시피 할 정도로 치킨과 맥주를 팔아줬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라 고민도 나이도 눈높이도 고만고만해 놀기 좋았다. 그래서 모임이 있는 날은 마치 축제처럼 설레고 신이났다. 다
내 나이 38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정적인 한국생활을 뒤로 하고 타국에서 하루아침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준말) 신세가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아프리카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이라는 나라,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38살 아줌마의 중국 체험기, 지금부터 시작해본다. 타오바오와 함께하는 중국 입성기 ②지난 글에서는 중국살이 5일차와 6일차에 타오바오에 입성해 11가지 물건을 사들인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두어야 하는 법. 열심히 주문한 물건들의 배송 후기로 시작할까 한다. 주문을 한 날
스웨덴에서는 아동에 대한 체벌은 완벽히 금지돼 있다. 이는 학교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교사든 부모든 그 누구에게도 매를 맞지 않는다. 교육적인 목적일지라도 교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매를 댄다는 것은 명백히 폭력 행위이고, 형사처벌의 대상이다.매만 금지된 것이 아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를 이유로 신체적 정신적 체벌을 가할 수 없다. 무언가 제재를 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이들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야단 친다’는 것도 교사나 부모가 일방적일 수 없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폭력의 전 단계로
5년 전 여름. 오빠가 모스크바에 갈 일이 생겼다며 비행기 값만 내면 데려가 주겠다고 했다. 돈도 없는데 뭔 여행이냐며 나는 옷소매의 실밥을 뜯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새언니가 말했다.“당신이 내주는 게 어때?”“상습범이야 아주!”오빠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빈말을 해주었다.“눈먼 돈 생기면 갚을게.”모스크바에서 더위 먹었다고 하면 왠지 거짓말 같지만 그곳의 여름은 겨울만큼이나 유별났다. 아주 찜 쪄 먹을 듯이 태양이 이글거렸다. 영어를 모른다며 아무데나 우리를 내려놓고 간 ‘택시노마스키’ 때문에 가방을 질질 끌고 다니느라 온 몸이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다가온다. 그녀도 내가 긴가민가 하나보다. 어떻게 해야지? 아는 체를 해야 하나? 모른 체 그냥 지나가 주면 좋으련만… 그런데 저이가 누구더라? 순식간이나 별안간보다 더 짧은 시간을 뜻하는 말을 불교에서는 찰나라고 한다. 1찰나는 약 75분의 1초라고 하니 가히 눈 깜박임 보다 더 빠른 시간이다. 나는 그 찰나의 시간에 수만 가지의 생각을 했다. 누구더라? 어디서 봤더라? 그냥 지나갈까? 인사를 할까?“어머, 안녕하세요?” 이런, 그녀가 먼저 말을 걸고 인사를 한다.“아, 네, 안녕하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내 나이 38세.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안정적인 한국생활을 뒤로 하고 타국에서 하루아침에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준말) 신세가 되었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리적으로는 아프리카만큼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이라는 나라,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38살 아줌마의 중국 체험기, 지금부터 시작해본다. 중국에 가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남편으로부터 듣게 된 건 작년 초다. 남편 회사의 생산 공장이 국내는 물론 중국에도 있는 관계로 그동안에도 중국 출장을 자주 다녀오곤 했다.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면 소주라는 곳에서 최소 2년,
내가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다. 이웃 동네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엄마는 낡은 집을 팔고 그리로 이사 가자고 아빠를 졸랐다. 안동 양반임을 자부했던 아빠는 웬만해선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그 무렵엔 엄마와 눈만 마주치면 고함부터 버럭 질러 엄마의 심장을 졸여놓곤 했다.“마당이 있고 비둘기도 날아오고 연못에 물고기도 헤엄치는 이 집이 얼마나 좋은데 이사를 가!”엄마는 비둘기 똥 때문에 살 수가 없고 한두 마리 꼴같잖던 물고기는 작년 겨울에 벌써 얼어 죽었다고 했지만 아빠는 요지부동이었다. 물고기는 다시 사다
2010년 이후 발칸 반도의 유럽인을 비롯해 북아프리카와 시리아와 터키 등 서아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난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스웨덴도 심각한 주택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중앙 정부나 각 코뮌(기초지방자치 단체)들이 나서서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아파트들을 짓기 시작하면서 스톡홀름 등 대도시 주변 코뮌들에는 마치 한국의 1980년대를 방불케 하는 건설 붐이 일기도 했다.갑자기 아파트들을 많이 짓기는 했지만, 주택 가격의 상승도 불가피했다.얼마 전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Svenska dagbladet) 등의 언론에 따르면 지난 20년 간
55.브리타니코를 내려오는 길에 빗줄기는 여리게 흩날리고 있었다. 바위길이 미끄러워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 이탈리아노 산장에 다시 도착해 짐을 챙길 때에는 벌써 오후 네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세 시간 뒤에는 해가 질 것이기 때문에 로스 쿠에르노스에 닿으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조급해지기 시작했지만 금방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솔길을 따라 나섰다. 점점 길은 깊은 숲속으로 이어졌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해 숲 안쪽은 금세 어두워졌다. 배낭을 다시 메고 걸으니 한참 걸어온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