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동쪽으로 가면 길이 있다터키 동쪽에 있는 커다란 호수의 이름은 반(van)이었다. 지도를 펼쳐 놓아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였다. 그렇게 큰 호수가 있으면 가야지, 마침 우리는 터키의 동쪽에 있다. 진과 나는 자연스럽게 호수가 있는 도시로 향했고 그 도시의 이름 역시 반(van)이었다. 다른 터키 동부처럼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란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도 했지만, 이란으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꽤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여권에 이란에 다녀온 흔적이 있으면 미국 입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10월 초부터 동네 곱창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누군가 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면 ‘작가’라고 대답하기엔 뭔가 쑥스럽고 ‘백수’라고 말하기에도 자랑은 아닌지라 닥치는 대로 일을 해보기로 했다.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음식점 입구에 ‘주방 구함’이라는 종이가 써 붙여져 있길래 면접을 보러 갔고 사장은 나에게 ‘인상이 좋다’며 당장 내일부터 나와 일을 하라고 했다. 비록 동네 곱창집이긴 했지만 면접에 당당히 합격했다는 사실에 기뻤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시작된 곱창집 주방에서의 하루 6시간은 내가 상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살다 보니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들이닥쳤다.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광속을 달리고 있는 듯하다. 흩날리는 봄꽃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두터운 겨울 외투를 내려놓는가 싶었는데 화살촉 같은 한 여름 햇볕이 땀구멍 마다 내리 꽂혔다. 변화무쌍한 세상사와는 담을 쌓으며 변함없는 매일 매일을 살았는데 발걸음마다 서걱거리는 낙엽이 밟혔다. 그러다 보니 며칠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고 성탄절이 다가 온다. 도무지 따라 잡을 수 없는 광속의 세월은 눈가에 잔주름을 조각하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쿠르드의 도시디야르바크르로 가는 길에는 네 번의 검문이 있었다. 총을 멘 군인들은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를 검문소에 세웠고, 사람들의 신분증과 여권을 가져갔다. 검문을 받기 위해 여권을 내어 놓을 때마다 혹시 여권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군인들은 차분하게 네 번 모두 나의 여권을 돌려주었다. 가져가서 무엇을 확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길어지면 10분 넘게 기다려야 하기도 했고, 터키 현지인들은 귀찮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고개를 비스듬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단골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머리숱이 예전보다 많아진 것 같아요. 자르는 데 한참 걸렸네요. 혹시 두피관리하세요?” 두피관리라니. 샤워 후 머리를 완전히 말리는 것도 겨우 하는 내가 그런 것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 머리숱이 많아졌다니? 요즘 바뀐 거라고는 하나뿐이었다. “요즘 운동을 해서 그런 걸까요? 요가 하거든요.” 나는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운동이 몸에 좋긴 좋은가 보다. 머리숱이 많아지다니!’나는 전형적인 내향형 인간이다. 일정 시간 집에 콕 박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시간은 그곳을 다 지나쳐 갔다그 긴 시간은 이미 전부 흘러가 남아 있는 것이라곤 지금 당장의 시간뿐일 텐데, 오래된 도시를 걷다 보면 그 시간들이 층층이 쌓인 더께를 보는 것 같다. 오래 묵은 먼지가 희뿌옇게 날리고 있고, 시간을 빨아들인 것 같은 공기가 도시를 채운다. 가만히 선 채 낡아갔을 책의 냄새로 가득 찬 도서관처럼, 어떤 공간은 지나온 시간을 그대로 다 내어 보인다. 이를테면 바라나시 같은 오래된 도시의 미로 같은 골목을 걸을 때 멀리서 들려오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한국전쟁 당시 무방비 상태로 북한의 침략을 받은 우리 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다가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진을 하였다. 그러다가 미리 압록강을 건너 숨어있던 중국 인민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를 본 UN군은 새까맣게 밀려들어오는 중공군들을 human-wave-strategy라고 표현하며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해전술이다. 사람의 머리가 흡사 바다의 물결처럼 출렁이며 끝도 없이 몰려든다면, 더구나 적군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살아남는 전쟁터에서 검푸른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둘째 아이는 패션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었다.백화점에 들어서면 새 옷들의 스~멜에 미쵸버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옷과 신발을 실성한 듯 좋아하면서도 디자이너가 되려면 미친 듯 노력해야한다는, 아니 노력해도 될깡말깡 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둘째가 중2였던 어느날..공부 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영 장군 같은 모습에 열이 받아, 그놈의 책상 위에 밍크코트처럼 먼지가 쌓인 책들을 들어내버렸다. 집에 돌아와 텅 빈 책상을 보면서 컴퓨터 모니터를 정 중앙에 배치해놓고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무더위우리나라로 치면 대구 같은 곳이라고 해야 할까, 우르파로 향한다는 말에 현지인들도 거기 덥다고, 무척 덥다고 손부채 모양을 만들었다. 우리가 있던 안텝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데 얼마나 덥다고 그렇게 유난인지. 적어도 더위로 이름 난 도시임은 확실했다. 이미 터키 동남부로 왔을 때부터 날씨는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고, 남쪽으로 갈수록 더 더워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체감해 하며 신기해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 시절 메소포티미아 문명을 교과서에 배우며 들었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한동안 나는 굉장히 많은 요리책을 읽었다. 몇 달간 우리 집에 머물던 남자친구를 위해 집밥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또 고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냥 간단히 유튜브를 참고해도 될 것을 굳이 책까지 찾아보게 된 것은 내가 서양 음식에 대한 지식이 워낙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어릴 때부터 양식을 먹고 자란 남자친구의 식성을 고려한 음식도 몇 가지 해보자 싶었다. 그런데 나는 아는 서양식 집밥 요리가 별로 없었다. 유럽과 북미를 여행할 때도 특별한 명물 요리는 먹어 보았지만 한번도 그 지역만의 ‘집밥’이라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오스만낯설게만 느껴졌던 가지안테프는 환대의 도시였다. 단 두 명에게 받은 환대였지만, 처음 여행 온 사람은 으레 도시를 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인상으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셀라미와 누리가 온갖 밥과 술과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던 덕분에,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터키 동부에 왔다는 얕은 두려움은 금세 사라졌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마당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던 밤이 지났다. 오랜만에 사람들로 가득 찬 도미토리를 떠나 2인실에 묵게 된 나와 진은 햇볕이 내리쬘 때까지 오래도록 잤다. 눈을 비비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맑고 청명한 가을의 하늘이 흐르고 있다. 어느새....머리 꼭대기를 향해 내리꽂던 한 여름의 태양이 힘겨웠던 때가 언제였나 싶게 계절은 또 바뀌어 간다. 희한하게도 지난 계절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오직 더웠다는 맹목적인 사실만 뇌리에 남아있을 뿐이다. 태어나서 철이 들고 계절의 순환을 수 십 번씩 겪으며 살다 보니 이제는 특별히 기억할 것도 남길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시간들이고 세월들인가 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계절은 서늘한 바람을 동반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기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터미널의 군중들처음 가지안테프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하루 종일 달린 끝에 겨우 도착한 터미널에서 내리는 순간, 둥글게 둘러서서 북을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버스가 늘어서 있는 터미널의 주차장은 조금 습하고 축축했고, 그 사이사이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둥글게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처음 도착한 도시의 밤에 만난 축제가 너무나 반가웠을 테지만, 이번에는 어딘지 두려웠다. 가지안테프는 터키의 남동부에 있었다.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도시는 아니었고, 특히 한국 여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내 위로 언니가 둘, 오빠가 하나 있다. 오빠는 어려서부터 바른 생활의 표본이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는 우등생이었고 집에서도 부모님 말씀을 어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오빠였기에 동생인 작은언니와 나는 오빠가 시키는 일은 될 수 있으면 군말 없이 따르는 편이었다. 오빠가 우리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 시키는 게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욕’이었다.오빠는 욕하는 걸 무지 싫어했다. 어려서부터, 남들 다하는 ㅆㅂ이나 ㄱㅅㄲ 같은, 사소한 욕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다 내가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나는 지난 10년간 옷을 거의 사지 않았다.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라든가 절약을 위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귀찮아서였으니까. 딱히 옷을 예쁘게 입는 것을 싫어한 것도 아니고 남의 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쇼핑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내서 간 옷가게에 가고 겨우 고른 옷들을 입어 보고 다시 벗고를 몇 번 하면 그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그래서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꼭 필요한 옷을 한꺼번에 사곤 했다. 그렇게 한 번 옷을 사 놓으면 이제 한동안은 쇼핑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자전거는 빠르다처음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렸을 때는, 마냥 신나 있었다. 드넓은 괴레메 주변 지형들을 걸어서 구경하기는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버스가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스쿠터나 ATV를 빌려 타고 싶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투어를 신청해 다니기에도 약간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고, 역시 돈이 없으면 몸으로 동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진과 나는 자전거를 빌렸다. 몸으로 구르면 돈을 아낄 수 있다. 길게 여행을 다닐수록 자꾸 아끼는 법만 늘어갔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사 투어가 들리곤 하는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괴레메의 뜻괴레메의 돌은 꼭 곡괭이로 패면 패일 것 같은, 거대하지만 충분히 단단하지는 않은 인상의 돌이었다. 이 지역 대부분의 지형이 이런 돌로 가득했다. 바람인지 사람인지 돌들을 깎아 놓아 만들어진 기암괴석들. 버섯을 닮은 돌들부터 뾰족하게 솟아있는 돌들까지, 터키 중부 괴레메는 돌의 고장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근방을 카파도키아, 라고 불렀고 괴레메는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마을 중 한 곳이었다. 터키 여행하면 떠오르는, 돌무더기 너머 떠오르는 아름다운 벌룬이 뜨는 곳이 괴레메였다. 날씨가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아침이 오면 괜히 바쁘다. 정시에 출근해야 하는 회사원도 아니고 아침밥을 먹여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 아이도 이젠 없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임에도 집을 나서기 전까지의 아침 시간은 늘 분주하다. 아침잠이 많아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에 부치니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저녁거리부터 생각한다. 이젠 식구들이 저녁 한 끼만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쌀도 미리 씻어놔야 하고 먹을 만한 반찬이 있는 지도 확인한다. 양치를 하면서 냉장고를 두 서너 번은 열어 보는 것 같다. 저녁에 해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나는 평소 집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매일 아침 아버지의 밥을 정성껏 차려주시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은 항상 남아야지 모자라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가진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 집에는 항상 먹을 것이 넘쳐났다. 그래서 내가 따로 요리를 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난가을, 나의 남자친구로 인해 상황이 달라졌다.그는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러 한국에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이라 여행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한국에 들어오려면 어학연수 비자를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브락 같은 이들지친 마음으로 숙소의 문을 열었을 때, 막 체크인 중인 진의 익숙한 등짝과 그의 커다란 배낭이 보였다. 내 것보다 훨씬 큰 배낭이었다. 어쩌면 그의 배낭이 그렇게 큼직했던 이유는 그가 1년 넘게 계획된 긴 여행을 다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진의 크고 탄탄한 몸이 버텨낼 수 있는 무게를 생각했다. 나는 못 들고 다닐 배낭. 나보다 몸도 마음도 튼튼한 사람과 함께 할 때의 편안함이 있었다.몇 달 전에 몽골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이스탄불에서 하루를 보내고, 안탈리아에서 그를 다시 마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