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을 위한 변명
조병갑을 위한 변명
  • 승인 2005.05.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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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환 선생님이 청소년들에게 쓰는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그 첫번째

 

 

 

[편집자] 이 글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이사장이신 조광환 선생님(학산여중)이 청소년을 위해 집필 중인 `(가제)조병갑 위한 변명`의 일부입니다. 조광환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맛보기로 옮겨 싣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역사관`(줄여서 史觀)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죠? `역사관`을 간단히 정의하면 역사에 대한 견해나 역사를 생각하는 방식을 의미한답니다. 한 개인의 삶에 방식 또는 인생에 대한 관점을 인생관이라 하듯이 개인의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역사관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역사학에서 말하는 역사관은 이념 체계 혹은 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특정한 견해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용어로 `역사의식`이 있는데 이는 당대에 해결하여야 할 문제를 역사적 과제로 생각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해결해야할 문제는 과연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의식은 무엇일까요?

아마 여기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게 나오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필자는 그 해답을 지금의 현실과 비슷한 과거의 역사 속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란 바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입니다.

아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전봉준`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전봉준`의 대척점에 서 있는 탐관오리의 대명사 고부군수 `조병갑`을 말합니다. 또 부정부패의 표상이 된 `조병갑`을 너나 없이 지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오욕을 `조병갑` 혼자서만 져야하는 것일까요?

이에 조병갑은 매우 억울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견디다 못해 조병갑은 1898년 8월 18일자 독립신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해명성 기사를 실었습니다.

"민요는 고부민요 수월전에 고산 등 각 군에서 먼저 일어났고 동요는 보은 등 각 군지방에서 1893년 가을에 일어났고 갑오동요는 전봉준이가 사월에 무장에다 방을 걸고 고창 등 각군에서 작요한 것은 그 때 감사 김문현씨의 등보가 있었으니 고부동요가 아닌 것은 가히 알겠으며 또 민요로 말할진대 백성이 관장의 탐혹을 못이겨 일어났다 할진대 조병갑씨가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그때 명사관 조명호·안핵사 이용태·염찰사 엄세영·감사 김문현 쩨씨가 다섯 번 사실하였으되 소위 장전이라 이르던 1만6천냥 내에 2천8백냥은 당초에 허무하고 1만3천2백여냥은 보폐가 분명한지라 만일 안핵사 이용태씨가 빨리 장계를 하였더라면 조병갑씨는 다만 민요로 논감만 당하였을 것을 이용태씨가 무단히 석달을 끌다가 비로소 무장군 동요 일어난 후에 겨우 장계를하여 그해 정월에 갈려간 조병갑씨로 하여금 오월에 와서야 파직되고 귀양간 일을 당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간의 시비는 세계 제 군자가 각기 짐작을 하시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조병갑은 시대를 탓합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한 말처럼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벼슬만 하면 마음껏 백성을 수탈하던 시대에 자신보다도 몇십 배 더 수탈한 중앙의 고관대작들이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조병갑은 조무래기에 불과한데 하필 자신만 지탄받을 일이 뭐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위 글에서도 안핵사 이용태가 1차 봉기 후 고부로 들어와 사태수습을 3개월이나 질질 끌었던 바람에 2차 봉기가 일어났다면서 책임은 이용태에게 있고 조병갑 그 자신은 억울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병갑은 정말 그의 주장대로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일까요?
조선시대 평민들이 지는 세금을 통칭하여 삼정이라 합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환정)을 일컫는데 그 중 전정이란 농토에서 나오는 수확량에 부과한 세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토지에 대한 기본세 이외에도 각종 부가세가 징수되어 농민들은 엄청난 부담을 져야했습니다. 예컨대 관리 식사비, 서원 제사비, 감사 생활비, 가마수리비, 신관 수령의 부임 여비 등 규정 외의 항목으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 밖에도 지방관아에서 행하는 잡다한 행사비용은 물론, 기생을 끼고 음풍농월하는 유흥비까지 부가 세목에 추가했답니다. 그리하여 전세의 수탈은 1곁에서 나는 수확은 평균 6백 말 정도였으므로, 전정에 의한 착취 량만 하더라도 수확의 약 3분의 1에 육박했습니다.

군정이란, 군대에 가야하는 장정(16세∼60세에 해당하는 평민 남자)이 군역에 직접 나가지 않는 대신 국가에 납부하는 군포(옷감)를 말하는데, 조선 후기에는 각종 명목으로 징수액을 늘려 장정 한 명이 부담하는 군포의 양도 점차 불어났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백골 징포, 어린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거두는 황구첨정, 군역을 피하여 도망간 사람의 이웃에게 군포를 떠맡겨 수탈하는 인징, 일가 친척에게 넘겨 빼앗는 족징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목민심서』병전에 군정에 대한 당시 실상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습니다.

애절양(생식기 자름을 슬퍼함.)

갈맡 마을 젊은 아낙의 곡소리 기나긴데
현문(현감이 근무하는 관아의 문) 향해 곡하고, 푸른 하늘 울부짖누나.
남편이 출정 나가 돌아오지 않음은 오히려 있을 법
하건마는
예부터 사내가 생식기 잘랐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오.
시아버지 돌아가셔 이미 상복을 입은데다,
아이는 아직 배냇물도 씻지 않았는데,
세 사람의 이름이 군적에 올랐다나요.
처음으로 호랑이 같은 문지기에게 가서 하소연해 보려 함에
이정(지금의 이장 정도되는 직위)이 포효하며,
마굿간에서 소를 끌고 나갔지요.
칼을 갈아 방에 드니, 피가 자리에 흥건한데
아이 낳아 곤궁을 만났다고 스스로 한탄하던걸요.
더운 방에서 궁형을 행하는 것이 어찌 허물이 있지 않으리요.
민나라 사람들이 자식을 거세했던 일도 진실로 또한 슬픈 일이라오.
산 것이 살고자 하는 이치는 하늘이 부여해 준 것 이라서
하늘의 도는 사내를 만들고 땅은 계집을 만들거늘
소와 돼지 거세함도 오히려 슬프다고 말할진대
하물며 백성들이 자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서랴.
세도 있는 집에서는 일년 내내 풍악을 울리지만
쌀 한 톨, 비단 한 조각 축나는 일 없다네.
우리 백성들 똑같아야 하거늘 어찌해서 가난하고 부유한가?
나그네는 창가에서 거듭 시구편을 읊조린다오.

다산은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갈대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군적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환곡이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아의 곡식을 대출하였다가 추수할 때 거두어들이는 제도인데 점차 고리대가 되어 관리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환곡에서 가장 수탈을 많이 당하는 사람들은 소농과 빈농이었고, 이들은 전세와 군포의 부담까지 짊어져 3중의 고통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녀를 올려야 일이 시작되고, 돈을 보내야 일이 추진되니, 돈 없고 여인 없는 사람은 어디에 기댈고(送上美女主動辦 送上錢財推着辦 無錢無女何處). " 탐관오리가 판을 치는 중국의 실정을 한탄한 노래로 과거 봉건왕조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랍니다. 얼마 전 중국 최고 인민검찰원 기관지 검찰일보는 이런 탐관오리들을 쉽게 구분해낼 수 있도록 "탐관오리들의 여덟가지 특징" 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답니다.

이에 따르면 탐관오리의 특징 중 첫째는 포장에 능하다(善於包裝)는 것입니다. 노동영웅.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등 감투를 내세워 자신의 구린 구석을 감춘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호색(好色)이며 셋째는 호색 결과로 아내와 도둑 및 애인을 무서워 하는 "세가지 두려움" 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무서워하는 이유로는 자신의 불륜 때문에, 도둑을 무서워하는 이유로는 숨겨 놓은 부정한 재물로 인해, 그리고 애인은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지 뭡니까.

넷째는 단명(短命)이랍니다. 범죄가 드러나 사형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데다 언제 죄수가 될지 몰라 우울증에 시달리며, 심한 경우 두려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종교욕과 미신입니다. 죄를 너무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사당만 보면 향불을 사르려 하고, 불상만 보면 목을 조아린다" 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인색이랍니다. 탐관오리일수록 남을 돕는 자선에 인색하며 힘없는 백성에게는 아주 냉정하다는 것이지요.

일곱째는 도박입니다. 탐관오리의 상당수가 도박 때문에 부정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조사됐답니다. 여덟째는 가난한 집안 출신 가운데 깨끗한 관리도 많지만 탐관오리들은 공통적으로 출신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가치관이 정립되는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돈에 한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죽했으면 지난 1998년에 이웃나라 중국의 총리로 취임한 주룽지(朱鎔基)는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내 것을 포함해 100개의 관(棺)을 준비하라"며 청렴한 정치를 하겠노라는 배수진을 쳤고 실제로도 그는 각종의 부정부패로 치부한 공무원 수백명의 옷을 벗겼으며 악질범죄일 경우에는 가차없이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단순히 먼 옛날이야기나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작년에 `반부패 국민연대`가 서울의 중고교생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 부패·반부패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우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부패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91%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실로 충격적인 결과 발표가 나왔기 때문이지요.

또 이 설문에 답한 학생들의 72.5%는 우리나라를 부패 순위 1∼20위군에 속하는 국가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정말이지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공직자가 돈을 많이 벌고자 한다면 오늘 당장 사직하고 장사를 해야 하지요.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도 "높은 자리는 과녁과도 같아서 누구나 거기를 향해 활을 쏘고자 하니 항상 처신에 조심해야 한다"고 공직자, 특히 고위공직자들의 처신에 대하여 강조하셨던 것이다.

또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 designtimesp=4520>에서 탐관오리를 `자벌레`라 했는데 이 `자벌레`는 먹을 것이 보여야 기어가고 겁을 주면 움츠리고만 있기 때문이랍니다. `세계화`랍시고 아무리 기술개발을 앞세우고 경쟁력을 부르짖어도 국가기구나 관료들이 기업의 경쟁력을 빼앗을 때는 방법이 없다. 정상적 이윤을 챙기기도 힘들게 출혈경쟁을 하면서 수출하는 기업에 손내미는 정치인들이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특히 근로자들의 정당한 임금인상이나 복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업들이 정치인들에게는 수 백억 대의 대가성 뇌물을 주고받는 오늘날 우리 정치 현실 속에서 `애절양`은 흘러간 옛 시 구절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들려 오는 현재 진행형의 외침입니다.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온 조병갑은 위의 삼정을 이용한 수탈은 물론 다양한 명목으로 고부군민들에 대한 불법적인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심문 당한 기록인 공초를 보면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형틀에 묶어놓고 있지도 없는 죄를 물었다고 합니다.

순박한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매가 무서워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라고 했다가는 어떤 엄청난 죄를 뒤집어쓸지 모를 일인지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매우 쳐라"하는 호령과 함께 매가 날아들었지요.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모진 매를 맞고 기절하면 물을 퍼부어 정신이 들게 한 다음 머리 속으로는 주판알을 튕기면서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네가 네 죄를 알렸다"라고 되물었답니다.

이 때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농민에게 사또의 영원한 콤비 이방은 엄지와 인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싸인을 보내고 그제 서야 눈치를 알아차린 죄인 아닌 죄인인 농민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라고 죄를 시인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들이 풀려나게 된 것은 없는 죄를 불고 군수가 흡족할 정도의 물건을 갖다바친 이후였습니다. 이 때 갔다 붙여진 죄명은 부모에게 불효한다,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다, 음행을 저지른다, 잡기를 일삼는다 등 갖가지 명목이었답니다. 이렇게 강탈한 재물만도 2만 냥에 달했다.

횡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면세를 약속하고 농민에게 황무지를 개간하게 한 뒤, 정착 추수기에 가서는 세금을 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선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천여 냥이나 되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그는 대동미를 쌀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 나쁜 쌀을 사다 바쳐 차액을 착복하였다. 이렇게 백성을 수탈하고, 나라 재정을 파먹었으니, 그는 관리가 아니라 강도였지요.

마침 선정비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하지요. 경상남도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엔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라는 이름의조병갑 선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리어 고종 24년(1887) 7월에 비를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1892년 4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여 갖은 포악한 정치를 자행한 그가 불과 몇 년 전함양군수로 재직했을 때 위와 같은 선정을 베풀었다는 말에 의구심이 들지요? 사실 우리 나라에 산재해 있는 `영세불망비`나 `선정비`라는 이름의 공덕비들의 대부분은 그 지역주민들이 수령의 바른 정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세운 비라기보다는 강제에 의하여 세워진 것들이랍니다.

`설화 한국의 역사`에 실려 있는 선정비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를 세우는 것은 왕이 승하하면 장사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돌을 세운다는 것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뜻에서 옛 사람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워왔다. 이것을 민간에서 모방하여 관찰사나 군수, 현감에 대하여 그들의 시책이 잘 되었을 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우게 됐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吳章)이 군수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청백리인 최석(崔碩)이 선정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선정비의 시초라 생각되며, 최석은 승평부(昇平府)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합니다.

고려시대 풍속으로 태수가 바뀔 때면 고을 백성들이 태수에게 기념으로 말 8필을 주었답니다. 이것은 일종의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이라고 최석은 벌써 그 뜻을 짐작하고 그가 승평부의 태수를 그만두고 돌아 올 때 전부터 내려오던 관례대로 말 8필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고, 도중에 말이 망아지를 낳아 9필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에 짐을 풀고 최석은 망아지까지 9필의 말을 도로 보내 주었답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감격하였고, 청백리로서 한 번 모범을 보이자 그런 일을 그 후부터 못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그의 덕을 칭송하여 비를 세우니 그의 선정을 칭송한 선정비라 세상의 사람들은 이것을 팔마비라 하였답니다.

이러한 선정비가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작스레 많아졌고, 명종 때에 벌써 한 고을에 4~5개의 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세운지 30년 이내의 것은 모두 뽑아 버리라고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선정비 건립의 난립을 막으니 백성들이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하니 그 폐단이 오죽 심했겠습니까?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00의 영세불망비"니 "... 송덕비"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에는 정말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진심에서 세운 선정비도 있겠지만, 크고 글자도 많이 새겨져 있을수록 백성들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된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 싶습니다. 거리마다 선정비요, 골목마다 송덕비라. 선정비가 수천개나 되었으니 얼마가지 않아 선정비의 주인공이 다른 곳으로 가고 그의 세력이 떨어지면 비석에 대한 파괴행위가 심했는데, 이런 일로 그 비석은 근처의 논두렁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논물을 막는 물고가 되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태인 피향정 내에는 조병갑이 저지른 탐학의 징표로 `조후규순영세불망비`가 윗부분이 일부 파손된 상태로 남아 조병갑은 대대손손 부친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으니 영세불망(오래도록 세세손손 잊지말자)은 영세불망인 셈입니다. <조광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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