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은 기자의 코스별로 안내하는 북한산 산행기 6


#정릉 계곡. 막바지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걸었다. 걸을만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한여름 내내 서울 하늘을 뒤덮고 있던 뿌연 하늘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지난번 한반도를 비켜간 태풍이 쓸고 가버렸나?? 코 끝에 와닿던 자동차들의 매캐한 내음도 종적을 감췄다. 여전히 차들은 달리고 있는데…. 그래서 걸었다. 날씨도 덥지 않았다. 서울에 이런 좋은 날도 있구나, 절로 생각이 들었다. 걸어도 걸어도 피곤할 것 같지 않은 지난 토요일의 오후.


#정릉매표소에서 5분여 들어가다 만나는 표지판. 대성문 방향으로 좌회전(좌측). 오른쪽은 결실을 맺은 밤송이. 드디어 가을이다.

신문사에서 근무를 마치고 출발한 게 2시. 정릉 청수장에 도착한 게 3시 30분. 우선 소요를 일으키며 아우성인 뱃속부터 2500원짜리 선지해장국으로 채운다. 그리고 등 따시고 배 부르고, 기분 `캡`인 북한산행이 시작된다. 다소 늦은 감이 있어 짧은 코스를 택하려다 걸은 김에 좀 더 걸어보자는 왕성한 의욕이 발길을 예정했던 코스에서 다른 코스로 이동시킨다. 배낭엔 달랑 물 두병. 그래도 허전하지 않다. 발길을 바꾼 오늘의 코스는 정릉 청수장→형제봉→대성문→산성주능선→보국문→대동문→소귀천 계곡→할렐루야 기도원→우이동 1217번 종점이다. 예상 소요 시간 3시간. 한적하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하늘거린다. 기분좋은 모양이다. 가녀린 이파리와 파아란 꽃잎이 투명한 하늘과 천상의 조화를 이뤄낸다. 콧노래가 절로 난다. 이미 1시간 30여분을 노동에 시달린 발이지만 불평이 없다. 주인의 콧노래 소리가 들리는지 가벼웁기만 하다. 한적한 코스를 택한 덕분인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조그마한 약수터(독자님들께 죄송하지만 머리만 믿고 이름을 제대로 적지 않았다가 깜빡했다. 신천수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몇 분이 자리를 깔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저분들은 얼마나 좋을까, 매일을 산에 올라와도 될 터인즉…하는 생각을 했다가 금새 접는다. 그 분들에게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렸을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기에, 그래서 저토록 여유있는 노년이 가능할 것이기에….

올라가는 길은 크고 작은 나무들에 가려 하늘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잠깐잠깐 햇살처럼 나뭇잎 사이를 헤치고 나타나는 파아란 하늘은 피톤치드가 전해주는 그것 보다 백배는 더한 기쁨을 선사한다.

산 아래에 서봤자 정상은 고사하고 바로 몇 걸음 앞조차 잘 구분이 되지 않았던 지난 여름의 흐린 기억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랴 싶을 정도로 뚜렷하게 다가선 하늘과 나무, 그리고 가을. 이날 같으면 마이너스 돗수의 안경을 벗어버려도 모든 게 선명할 것만 같다.

몇 걸음을 떼면 머리에서 얼굴에서 목에서 가슴에서 등에서 사타구니에서 철철 흘러내리던 한 여름의 땀도 간신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정도. 등산로 주변에 피어있는 손톱만한 크기의 이름모를 야생화조차도 기분을 한껏 돋우게 만든다.
그렇게 기분 좋게 걷기를 한 시간여, 문득 형제봉이 끝나는 지점과 만난다. 형제봉은 평창동과 정릉 사이에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는 닮은 꼴의 봉우리 두 개를 일컫는 말. 거쳐오려고 했으나 자연에 취해, 가을에 취해 무심코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바로 옆 코스로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곳서 우회전하면 대성문 가는 길. 산책로 같기도 하고, 등산로 같기도 한 것이 오르락 내리락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반복을 거듭한다. 가끔 계단도 나오고…. 왼쪽으로 보현봉이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 등산길에 사람들이 하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보현봉 정상에서 한 종교의 목사가 산상기도를 올리다가 예수님을 만났데나 어쨌데나. 그래서 그 정상을 다시 한번 바라본 일이 있는데…. 어쨌든 보현봉은 북한산 서부쪽에 있는 봉우리들 중에선 가장 높다. 지금은 휴식년제가 적용돼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데 가끔 그 정상에 올라선 사람들이 먼발치에서도 보이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하는` 심보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름다운 모습의 건축물. 대성문이다.

삼십여분을 더 걷다보면 나타나는 우아한 기와지붕의 건축물. 바로 대성문이다. 대성문 남쪽의 조그만 공터는 한 겨울에도 개나리꽃이 만개할 정도로 햇살이 잘 든다. 대성문을 오르자 드디어 확 트이는 시야. 왓, 여기가 서울 맞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좌회전 하면 대남문을 거쳐 문수봉-사모바위-비봉-향로봉을 거쳐 불광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온다. 보국문 방향으로 우회전. 산성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에서도 탄성을 이어진다. 끝없이 펼쳐진 서울 도심의 모습. 가득찬 아파트에 고층빌딩 숲 투성이라 할지라도 이날만은 그렇게 찬연하게 보일 수가 없다. 머얼리 구리시와 남양주시도 한 눈에 들어온다. 끝이 어딘지 모르게 펼쳐진 장관. 이런 날이면 비봉이나 향로봉쪽에선 분명 인천 앞바다도 보일 터.


#오랜만에 보는 서울 도심의 전경.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없는 게 아쉽다.

보국문에 가까이 이르니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등이 눈앞을 아질아질하게 만든다.
대동문에 이르니 소요된 시간이 대략 2시간여. 탈출. 진달래능선으로 얼마간 내려가다 갈라지는 길에서 세 번 좌회전을 하면 소귀천이란 계곡이 이어지는 우이동 하산길이 나타난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기에 하산길로는 제격이다. 무릎 관절에 무리가지 않을 만큼의 평평한 길에 우거진 나무숲들. 거기다 그지없이 차고 깨끗한 계곡물까지…. 가을이면 북한산 전체 등산로 중 절대 빠지지 않을 절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바로 단풍이다. 연인과 함께 우이동에서 차를 내려 올라와보는 것도 썩 추천할 만하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가을의 모든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을 터이니….


#백운대와 만경대, 노적봉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산길에 만나는 용담수-용천수에서 목도 축이고, 한시간여를 그렇게 내려오다 보면 소귀천 매표소와 만난다. 바로 지나자 마자 나오는 다리. 옥류교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할렐루야 기도원. 옛날에 아주 유명한 요정이었다가 고향산천이라는 한정식집으로 바뀌었다가 최근 다시 할렐루야 기도원으로 바뀐 곳이다. 거대한 기와집들이 여러 채, 볼 만한 광경이 이어진다. 그 초입에선 990원짜리 칼국수도 판다. 각종 찻값도 990원. 들러볼 만하다.


#소귀천 매표소 입구에 있는 옥류교와 할렐루야 기도원.

약 20여분을 아스팔트길을 따라 더 걸어내려오면 다시 도시와 만난다. 입구엔 수십개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전부 싸고 음식점들간에 경쟁이 붙어 맛도 괜찮다.
초가을, 아니 한가을 하늘 아래 북한산에서 느껴본 정취다. 내일은 우리 공주와 다시 한 번 더 와봐야지, 이 좋은 날씨를 혼자 만끽하는건 너무 아까운 일이다. 정명은 기자 sljung9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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