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스러져가는 재래시장을 찾아서 첫회-경동시장

언니는 사장, 여동생은 부사장, 언니네 남편은 회장인 생선파는 노점상 
"우리같은 수녀들 먹고 살기 힘들어…수녀? 기자가 그것도 몰라 내가 기자해야겄네!!"
대형 마트 등지에선 볼 수 없는 온정과 활기 가득…그곳에 가면 생기까지 덤으로 줍니다!!


작년 한 해 얼어있던 소비심리는 서서히 풀려가고 있는 반면 주머니 사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머니 사정을 보통의 백화점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이 곳의 체감경기는 주머니 사정보다는 주차장 사정이 우선 시 되니까요. 서민들이 돈을 쓰고 싶어도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며 이것저것 따져가며 사야하는 곳은 시장일 것입니다.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물건값을 깎아보려 실랑이를 벌이고 덤이 없으면 웬지 서운함을 느끼는 그 곳에 가봤습니다.

제기역과 청량리역 사이에 걸쳐져 있는 경동시장은 1960년에 농산물 시장으로 자리 잡아서 현재는 종합 도·소매 시장으로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약령시장과 수산물 시장은 각각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대구시 약령시장과 노량진 수산시장에 못지 않은 규모로 성장한 곳입니다. 그만큼 유명한 곳이라 이곳에는 늘 사람이 많습니다. 대형 할인마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생기를 잃고 있는 재래 시장들과는 달리 아직도 제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TV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걸진 목소리로 `싸다`를 외치는 상인들이 늘어서 있고, 한편에서는 물건을 놔두고 주인과 가격 실랑이를 벌이는 할머니의 모습도 보입니다. 어디를 봐도 온통 활기찬 모습뿐입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옆 사람과 소근소근 말해야 하는 곳과는 다르게 에너지를 복 돋우어 주는 분위기입니다. 기분이 우울했던 사람도 이 곳에서는 인상을 쓸 수가 없을 듯 합니다. 우울하다며 쳐져 있다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 이리저리 채일뿐더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들 때문에 사색에 빠질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령시장과 농수산물 시장을 경계짓는 교차로에는 생선을 파는 노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가게의 사장과 부사장 명함을 가지고 있는 모씨 자매는 이 지역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명물들입니다.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에서 올라왔다는 두 자매는 처음 보는 사람도 단박에 알아 챌 수 있을 정도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합니다. 물건 살 일 없는 게 뻔한 젊은 학생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도 귀찮아 하기는 커녕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냅니다. 이게 시장의 정(情)인가 봅니다.

이곳은 노점이 아니라 언니가 사장, 동생이 부사장, 언니네 남편이 회장인 `수산회사`입니다. 커다란 널빤지 두 개로 만든 좌판에는 속초에서 올라온 오징어와, 러시아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몸치장을 했다는 동태포, 중국 토박이인 부새 조기와 바지락이 올라 앉아 있습니다. 이것저것 가격과 산지를 묻자 잠시 얼굴에 그늘이 스쳐갑니다. 예전에 방송국에서 나와서 취재를 해갔는데 피해를 봤다는 것입니다.

"뭔 라디오에서 나왔는데 네 마리에 만원 하는 조기를 방송에서는 조기가 만원이라고 해버리는 거야. 그럼 사람들이 조기 한 마리에 만원인 줄 알지 네 마리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당장 찾아가서 한판 할라고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모 사장님께 웬지 제가 죄송함을 느낍니다.
모 사장님은 "그 방송국도 기사를 줄이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러면 우리 같은 수녀는 정말 먹고살기 힘들어"라며 신세한탄을 합니다.


#언니가 사장, 동생이 부사장, 언니 남편이 회장인 모씨네 수산물 회사 자매들의 표정이 밝기만 합니다.

수녀란 말에 의아함을 느끼며 반문하자 모 사장님은 이내 특유의 웃음을 보이며 대답합니다.
"기자가 그런 것도 몰러? 내가 기자 해야 쓰겠네∼ 우리 아들이 한문선생이라 내가 한문을 잘 알거든. 기자양반이 생각하는 수녀는 수녀원 할 때의 수녀고, 내가 말한 건 천한 사람을 뜻하는 수녀여."
자식이 한문선생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모 부사장님은 또 자식자랑 한다며 핀잔을 주지만 모 사장님은 개의치 않습니다. 겨울이면 오전 7시, 여름에는 오전 6시면 나와 장사를 하는 모 사장님에게 자식의 성공은 큰 낙입니다.

대통령을 시켜줘도 마다하겠다는 두 자매에게 이 곳은 살만한 곳입니다. "우리가 일하고 싶을 때까지 일할 수 있고, 내가 벌어서 배때지 따뜻하게 먹고 잘 수 있는데 뭐가 부럽겠어? 우리 별로 안 힘들어∼"라고 말하는 모 부사장님의 말에서 낙천적 자세의 힘을 엿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근에 생긴 모 할인점으로 인해 매출이 반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모 사장님은 "2년 전에 (마트가) 생겼는데 사람이 그 전에 반도 안 와. 우리 같은 사람 다 죽는 거지. 그런 건 다 없애버려야 혀"라며 어두운 낯빛을 처음으로 내비칩니다. 조그만 재래 시장이 사라져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동시장 같은 큰 재래 시장도 타격을 받는 건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수산물 거리를 돌아 들어가면 야채상들이 손님들을 맞이합니다. 대부분 서너 가지 이상의 품목으로 구색을 차리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노점상도 제법 눈에 띕니다. 길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 파를 파시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이 할머니는 방금 전 다녀간 손님 때문에 기분이 매우 언짢습니다. "파를 한 단 팔면 500원, 한 무데기(다발)에는 100원 남아요. 그런데 방금 저 여편네가 한 무데기 1000원어치 사가면서 파 몇 뿌리 더 집어가 버리잖아. 100원 남기려고 장사한 건데 저런 사람들만 오면 난 손해 봐요"라며 하소연을 합니다.

덧붙여서 할머니는 "내가 오죽하면 손님이랑 싸우겠어요? 다른데 가면 아무 말 안하고 척척 잘 사면서 왜 여기 와서는 그러냔 말이야"라며 속상해합니다. 겨울에 파를 내놓으면 파 상태만 안 좋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장사를 해야 하는 할머니에게는 더욱 속상할만한 일입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시장에 와서 각박하게 굴지 말라는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시장에 오면 깎는 맛, 덤을 챙기는 맛이라고 생각하며 이 곳에 왔던 제 얼굴은 달아오릅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할머니는 "근데 기자에요?"라며 물어옵니다. 어떻게 아셨느냐는 질문에 "젊은 사람이 앉아서 쓸데없는 얘기하는 거 보고 알았지"라며 웃습니다. 요즘 경기가 어떤지 묻는 말에 할머니는 "설 대목을 타느라 그런지 영 안돼요. 연말보다는 그나마 나은데 평소 주말보다도 안되네. 이번 달 말은 돼야 풀리겠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평소 매출이 하루 5∼10만원 정도인데 요즘에는 5만원 채우기가 버겁다고 합니다.

이 곳 상인들은 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메뉴는 죽, 칼국수, 김밥 등이라고 합니다. 오늘 점심은 1000원 하는 수제비를 먹었는데 내일(일요일) 점심이 늘 걱정입니다. 상인들을 상대로 1000원짜리 이동식 식사를  제공하는 장사꾼들이 일요일에는 아예 쉬는 까닭입니다. 일요일에는 어쩔 수 없이 4000원 하는 식사를 주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요일에는 장사는 더 안되고 나가는 돈은 더 많은데 차라리 집에서 쉬시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집에 있으면 몸이 아파요. 계속 몸을 고생시키면 모르는데 가만히 쉬면 더 아프더라구요"라고 합니다. 삶의 고단함이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할머니의 주름살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입니다.

곡물가게들과 과일가게들을 지나면 반찬가게가 나옵니다.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만드는 맛깔스런 반찬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절임류를 취급하는 `동현 엄마네`는 고추, 깻잎, 참외, 마늘 등을 팔고 있습니다. 이 절임들은 공장에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만든 것처럼 겉모양새가 좋습니다. 종류를 불문하고 한 근에 2000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얼굴 표정이 밝아 보입니다. 남편과 함께 장사를 하고 있는 이 가게는 길목이 좋아서 장사가 잘 되는 편이라고 합니다.
몇 시에 가게문을 열었냐고 묻자 조금 늦은 게 8시라는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여주인은 " 오늘은 늦어서 8시에 나왔어요. 8시면 이른 시간 아니에요. 도매상들한테 팔려면 새벽 5시에는 열어야 하는데 오늘은 늦은 거죠" 라며 웃습니다. 오늘도 장사가 잘 됐냐는 질문에 여주인은 "오늘부터 날씨가 좀 풀렸잖아요. 날씨 포근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네요"라며 장사가 잘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옆에서 부지런히 가게 정리를 하는 남편의 얼굴도 밝습니다. 재래 시장의 젊은 부부에게서 재래 시장의 생기와 미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경동시장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야채, 과일, 육류, 곡물, 수산물, 약재, 옷감, 공산품… 이루 셀 수 없는 품목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에 가도 그대로 있습니다. 오히려 더 깨끗하고 예쁘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경동시장 같은 재래 시장에는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온정과 활기입니다.

재래 시장에서는 누구네 엄마, 어디출신 김씨 같은 우리 이웃이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점원으로서 물건을 파는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과는 다르게 살아 움직이는 기분을 느끼게 해줍니다. 소비심리가 살아나도 주머니가 여의치 못한 사람을 위해서 늘 싸게 팔고 하나라도 더 주는 인심이 살아 있는 곳이 재래시장입니다.
이번 설에는 음식마련을 위해 인근에 있는 재래 시장에 가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건과 더불어 생기까지 덤으로 얻어온다면 새해를 시작하는 친지들에게도 그 기운을 나누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오형석 기자 lorrely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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