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종묘공원 스타 입담 좋은 팔순의 만담 어르신



바람이 불었다. 햇볕은 따뜻했다. 그래도 추웠다. 날씨엔 아랑곳없이 종묘공원엔 많은 어르신들이 모여 있었다. 지난 겨울이 답답했던 어르신들이다.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들르던 곳인데…추운 날씨가 그들의 발길을 방해했다. 어쩌다 한 번 들러본 한 겨울의 종묘공원은 그래서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어쩌면 몇 분이 될지 모르는 어르신들은 이 따뜻한 햇볕을 다시 못하는 곳으로 가 계실 지도 모를 일이다. 이 봄, 다시 종묘공원에 나온 어르신들은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찾느라 애쓰신다. 혹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들으면 `끌, 끌…` 혀를 찬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를` 불안감에 마음이 움츠러든다. 인근 포장마차에서 파는 잔소주로 시름을 날려버린다.

그리고 난 어르신들은 불콰한 얼굴로 한 곳으로 향한다.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가 나는 곳. 어디서 행사라도 하나?? 수십명의 어르신들이 떼로 모여 있다.

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어보니 팔순을 돼보이시는 한 어르신이 큰 목소리로 웅변을 늘어놓고 계신다. 옷에는 부착식 마이크가 달려있고, 어디 방송국에서 온 것인지 카메라 한 대가 어르신을 향해 있다. 어르신 바로 옆에는 마이크를 든 젊은 사람도 눈에 뜨인다. 그리고 젊은 한 여성은 녹음기를 들고 인근에 서서 웅변을 경청하는 다른 어르신들을 취재하기에 바쁘다. 도대체 뭘까??  일단 가만히 팔순 어르신의 웅변에 귀 기울여보는 수밖에….

걸죽한 충청도 사투리로 쏟아져 나오는 얘기들…. 그런데 옛날 얘기 같기도 하고, 경험담 같기도 하고, 만담 같기도 하고…도대체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저 얘기를 듣고 있는 수밖에…. 듣고 계신 어르신들이 자주 까르르 웃으신다. 웃기는 얘긴가??



가만히 듣고 있다보니 얘기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팔순 어르신의 얘기 소재는 `이 진사와 셋째딸` 쯤 될 성 싶다.
충청도 어느 읍내에 사는 삼백석 부자 이 진사와 그 세 딸 사이에 벌어지는 평범한 듯 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얘기가 주를 이룬다. 잠깐 옮겨볼까??

어느 충청도 읍내에 사는 이 진사는 삼백석 부자. 이 진사에겐 딸만 셋이 있는데 큰 딸과 둘째 딸은 이미 결혼을 했고 막내인 셋째딸은 과년한데도 아직 결혼을 못한 처지다. 그런데 첫째딸도, 둘째딸도 모두 부자인 이 진사에게 큰 도움을 받으면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진사가 환갑을 맞은 어느 날, 이 진사는 자신을 찾아온 큰 사위와 둘째 사위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 덕에 잘먹고 잘 살고 있느냐?"
"그야 물론, 장인어른 덕분입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이 진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내 셋째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
"저는 제 덕분에 먹고 살고 있습니다."

예상 외의 답변. 이 진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내 저 년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진 잘 먹고 잘 사는 꼴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숯을 만들어 파는 한 산골 총각이 이 진사를 찾았다. 물론 숯을 팔기 위해서였다.
이 진사는 그 총각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내 숯 값 외에 돈 70냥을 더 얹어 줄테니 한가지 청을 들어달라"고 했다. 그 청인 즉슨 자신의 셋째딸과 결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혼기가 된 총각 입장에선 한 편으로 고개가 갸우뚱해지면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진사 입장에선 산속에서 숯이나 구워 팔고 사는 가난한 총각에게 셋째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고생을 시켜보겠다는 복수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약속한 날, 총각은 시장에 가서 옷을 사입은 뒤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이 진사를 찾았다. 셋째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산골 숯 총각을 따라 나서는 수밖에….

그리고 산골에서 숯 굽는 일을 도우며 지내던 어느 날 명절이 됐다. 숯총각이 장인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하자 셋째딸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숯총각 혼자서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남루한 헌 옷을 입고 이 진사를 찾은 숯 총각. 당연히 이 진사는 다른 사위들만을 위해 주었을 뿐, 숯 총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숯총각은 은근히 기분이 나빴으나 참았다. 이 진사가 그런 숯총각을 보고 꾀를 하나 냈다. 수수께끼를 내는 것이었다. 다른 두 사위에겐 미리 답을 알려주었다. "산이 높은 건 왜 높을까"라고 물으면 "돌이 많아서"라고 답하라고 했다. 두 사위는 당연히 그렇게 답을 했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던 셋째 사위는 "그러면 저 하늘도 돌이 많아서 높겠네요!!"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한 방 먹은 이 진사. 다시 두 번째 문제로 "길가에 버드나무는 왜 저리도 키가 작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약속된 답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라는 것. 두 사위의 답변 끝에 다시 숯총각이 답을 할 차례. 숯총각은 키가 작은 자신의 장모를 가리키면서 "그럼 장모 키가 작은 것도 장모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섭니까??".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하지만 어르신들은 이야기 듣는 내내 깔깔깔 웃음보를 연신 터뜨리신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옆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던 젊은 남자가 소개를 한다. 알고 보니 방송국에서 나온 줄 알았던 그 사람들은 한 대학교 국문과에서 `고담`을 취재해 책으로 묶어내기 위해 나온 이들이었다.


#만담 어르신이 자비로 구입해 사용하는 스피커.

그리고 이미 몇차례 그 웅변 어르신을 취재한 경험이 있는 듯 "여기선 굉장히 유명한 어르신"이라고 소개한다. 다른 어르신들도 모두 "이 할아버지 얘기 들으려고 종묘공원에 나올 정도"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다.

알고 보니 팔순의 어르신은 종묘공원에선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이셨다. 자비로 마이크에 스피커까지 구입해, 설치해놓고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으시는데, 얘기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이 워낙 구성지고 재미있어서 인기를 독차지 한다고…. 물론 얘기 듣는 값은 100% 공짜다. 이날 취재를 나온 대학생들은 얘기 중간 중간 어르신의 입이 마를까봐 음료수까지 대령해가며 열을 올렸지만….
이런 어르신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 만한게 아니겠나 싶다. 강수지 기자 nabiy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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