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은 기자의 서울인근산 샅샅이 훑기-북한산성→중흥사터→대남문→대동문

북한산성.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의 경계지역에 있는 오래된 산성이다. 사적 162호인 이 산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후 북쪽의 고구려를 경계하여 세운 성이다. 개로왕 때 축성하였으며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으나 근초고왕 때는 북진정책의 중심요새가 되기도 했다.

고려 고종 때는 세계 제패의 야심만만한 거대제국 몽골군과 맞서 싸우기도 하였고, 현종은 거란군이 침공하였을 때 태조의 재궁(梓宮, 관)을 옮겨 놓기도 했던 성이다. 본래는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말 우왕 때와 조선 숙종 때 석성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

본래 대남문, 대서문 등 13개의 성문과 비밀문인 7개의 암문, 지휘소인 동장대,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고 유사시 왕의 임시거처인 130칸의 행궁과 140여 칸의 군수용 창고도 있었으며 중흥사 등 12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미리 북한산성을 소개한 것은 오늘의 등산로 때문이다. 지난번에 이미 북한산성 매표소에서 북한의 제일봉인 백운대 아래 위문을 거쳐 도선사에 이르는 길은 겨울 산행길로 소개를 한 바 있다.

이번엔 북한산성에서 대서문을 거쳐 중흥사터, 그리고 대남문에 이르는 코스다. 대남문에서는 능선을 타고 대성문-보국문을 거쳐 대동문에서 탈출, 수유리로 내려갈 계획이다.

굳이 이 코스를 택한 것은 봄 기운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점에서다. 
일요일 오후, 북한산성 매표소까지 가는 길과 북한동에 이르는 계곡 코스는 지난 번에 상세하게 소개해 드렸기에 가급적 생략한다.

북한산 매표소에서 바라 본 백운대와 노적봉 원효봉 등은 지난 겨울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고 따스한 햇볕을 받아서인지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북한산성 매표소에서 이어지는 계곡길도 이전보다 물이 한결 불어나 있다. 얼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30여분을 오르니 나타나는 북한동. 북한산 아래 최고(最高)의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과 연기로 가득하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하산객들이 돼지고기 등을 구워 먹으며 불콰해진 얼굴로 지난 산행에 대해 얘기하느라 분주하다.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세갈래길에서 우회전. 약간의 오르막길이 나오고 우측은 깊은 계곡이다. 한겨울 문을 닫고 있던 계곡가 산장들도 다가온 봄을 맞아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을 채비에 나선 모습이다. 갈래길에서 10분여 걷다보면 나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문. 중성문이다. 계곡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중성문

중성문에서 20여분을 걸으면 중흥사 터가 나온다. 잠깐 역사 자료상에 나오는 중흥사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자.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중흥사 터는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기념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노적봉(露積峰) 남쪽 산록, 장군봉과 구암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중흥사는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고려 말에 태고(太古) 보우국사에 의해 중수(重修)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물로 1103년에 만든 금고(金鼓)와 1344년에 만든 향완이 남아 있어 12세기 초 이전에 이미 개창되었던 것으로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절이 대규모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조선 후기이다. 숙종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후 도성의 방어를 위하여 외각에 대대적인 축성 사업을 일으켰다. 숙종 39년(1713) 북한산성이 완성되자 성내에 승군을 두고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중흥사가 승군이 주둔하던 산성 내 11개 사찰을 관장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로써 축성 당시 30여 칸의 소규모 사찰이었던 중흥사가 136칸의 대찰(大刹)로 증축되었다.


당시 승군은 왕명으로 8도 사찰에서 1년에 6차례 교대로 의승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이고,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두고 승대장(僧大將) 1명을 임명해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하게 했다. 중흥사는 도총섭이 머물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승영 당시에는 삼존불을 봉안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萬歲樓)와 나한전(羅漢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었다고 하며, 동구(洞口)에는 `중흥동문(重興洞門)`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약재를 조련(造煉)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그 후에도 1828년에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건하는 등 사세를 계속 유지했지만, 1894년에 화재를 만났고, 다시 1915년에 홍수를 당해 무너진 뒤 중건하지 못하고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다.


#중흥사 공적비

그 옛날 역사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행려의 마음에 아릿한 감회를 전해준다. 등산로 옆에는 수많은 옛 벼슬아치들의 공덕비가 서 있는데 그 중의 몇 개는 중간이 부러져 나가 흉측한 모습이었다.

중흥사 터를 지나면 나오는 갈래길에서 우회전한다. 직진하면 용암문에 오르는 길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조그마한 계곡은 마치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이 정겹기만 하다. 경사가 완만하고 햇볕이 잘 들어서인지 계곡 주변의 식물들도 봄맞이 채비에 여념이 없다. 진달래는 만개가 초읽기에 들어간 듯 보인다.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조그마한 꽃을 피워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경사가 완만한 등산로가 주욱 이어진다.


#어영청터

이 계곡 등산로는 역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옛 유적들이 많다. 일단 중흥사 터에서 20여분 오르면 만나는 옛 행궁터.

이 행궁터는 전란 시에 임금이 대피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내외전 124칸의 웅장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북한산 문고를 마련하여 실록 등의 고문헌을 보관했는데 일제 침략기에 관리 소홀과 집중호우로 무너져 소멸했다고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서 10분여를 더 걷자 어영청 유영지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 어영청은 숙종 때 보현봉에서 수문 남측까지 축성을 담당하였다. 축성이 끝난 후에는 산성의 자치와 관리를 담당했던 관아로 대청 18칸, 내아 7칸, 양곡창고 48칸, 무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원랑 12칸 규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혼돈기에 관리 소홀로 소멸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꽤 넓은 넓이로 그 옛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등산객들의 상념을 자극한다. 유구한 세월, 무구한 역사의 자취여!!
어영청을 지나서부터 약간의 오르막길이 나오나 싶더니 종내는 급경사로 변한다. 산책하는 듯 여유로웠던 가슴에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몸 상태가 안좋아진 것인가. 사실 등산은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에 좋은 도구가 된다. 정기적으로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매번 산행때마다 달라지는 몸의 상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급경사 길을 오르다 오른편으로 나타나는 조그마한 집이 궁금증을 갖게 한다. 이런 산중에서 도대체 누가 살기에…. 하지만 사찰이다. 바로 사찰 바로 곁으론 약간의 땅을 개간해 만든 밭도 있다. 약수터도 있고….

5분여 오르면 대남문과 만난다. 북한산 매표소에서 1시간 30분 소요.
대남문은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인산인해다. 아마 북한산 전체 등산로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십여명씩 빙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는 사람, 과일을 깍는 사람, 대남문 위에서 흘러내린 땀을 씻어내는 사람 등….
우회전 하면 문수봉과 청수동암문 쪽이다. 좌회전한다. 산성주능선로가 이어진다. 능선로에도 등산객들이 상당히 많다. 15분 걸으면 대성문, 다시 10분여를 걸으면 보국문과 만난다. 보국문에서 10분여 더 가면 대동문과 만난다.



가히 등산의 계절임이 실감난다. 가는 곳 마다 등산객들 천지다. 이른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약간을 실망스러울 법도 하다. 아직 진달래는 듬성듬성 피어있을 뿐 완연한 꽃소식을 전해주고 있진 않다. 대성문 남쪽 출구 공터에 핀 개나리가 위안을 준다.

예정대로 대동문에서 탈출. 진달래고개를 거쳐 보광사 길로 빠지다가 이전에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 산중 주막 `인수재`에서 2000원짜리 두부 한 모에 2000원짜리 직접 빚은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신다. 참 오랜만이다. 속이 다 시원해진다. 조만간 이 주막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상세히 소개해 드릴 작정이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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