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출근길 한시간 동안의 서울뒤집기

약 3개월 전이었습니다. 쉼터에서 나와 일터를 향해 열심히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습니다. 개나리가 피고 있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처음 본 건 쉼터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전농동 떡전교 사거리였습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자 앞장서 걸어나가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청바지에 뾰족구두를 신은 그녀, 하지만 걸음이 무척 활기찼습니다.


#자료사진입니다.

한 시간 동안의 출근길. 많은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그중엔 안면이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분명 모르는 얼굴인데 어디서 봤음직한…. 물론 출근길에 지나다 한 두 번 스친 얼굴들일 겁니다.

그녀의 활기찬 뒷모습을 보면서 출근 시간이 늦어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성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청량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왠 걸, 그녀 계속 기자의 앞에서 저만치 떨어진 채 걷습니다. 기자의 걸음도 결코 느리지 않습니다. 오기가 발동해 따라 잡으려 해도 좀처럼 따라 잡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청량리 역전까지 왔습니다. 그녀 역전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섰습니다. 아하, 그럼 그렇지…이쪽 어디에 근무하는 모양이군,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청량리 로터리 맨오른쪽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청량리시장 일대가 시작됩니다. 10여분 걸으면 경동시장도 나옵니다. 그 너머는 서울한약시장입니다. 한약시장 끝머리에 이전 미도파 백화점을 리모델링해 오픈한 한솔동의보감이 있습니다. 그 앞 횡단 보도 불빛이 때마침 녹색으로 바뀝니다. 기자 건넜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마주쳤습니다.

"어라? 저 처녀 여기까지 걸어왔네…." 처음 얼굴을 보았습니다. 순박하고 예뻐 보입니다. 이번엔 기자가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녀가 뒤에서 따라옵니다. 그녀는 기자를 봤을 리 만무합니다. 용두대교를 건너는데 흑심이 발동합니다. 사실은 흑심은 아니라고 우기고 싶습니다. 기자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는 처지입니다.

`흑심`이 발동되면 안되는 처지인 게지요. 그래서 다시 수정, `호기심`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어떤 처녀이길래, 이 먼거리를 걸어다니는 거지? 정도의…. 매일 한시간 넘게 걸어서 출근하는 일, 사실 아무나 하기 힘든 일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용두대교를 건너다 말고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녀 기자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열심히 걸어오고 있더군요. 말 붙였다가 괜한 오해 사는 거 아냐?? 그것도 아침 이른 시간부터…고민 하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말을 붙여 보기로요. 다짜고짜 불렀습니다. 아마도 "저…잠깐만요!"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그녀, 못들은 채 그냥 가버리려고 합니다. 다시 불렀습니다. 힐끗 기자의 얼굴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더군요.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습니다. MP3 폰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불렀을 때 못들었던 모양입니다.

치한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말을 붙이게 된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얘기했습니다. 나도 1년 가까이 이렇게 걸어서 출근하고 있다…그런데 여기까지 걸어오는 걸 보니 대단하다…신설동역이 있는 곳까지 가는 데 그쪽 방향이라면 같이 걸으면서 얘기 좀 할 수 있겠느냐…등등의 얘기였습니다. 작업성이 강했나요??

`작업성` 발언에 넘어간 걸까요? 어쨌든 그녀 경계를 풀고 화답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와의 아침 출근시간 다소 `요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뜻 있는 만남이 시작됐지요.

그녀는 대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쾌활한 목소리로 동대문까지 간다고 하더군요. 물론 걸어서죠. 쉼터는 기자의 그것보다 거리가 더 먼 곳에 있었습니다. 외대앞 쪽이라더군요. 버스로 두어 정거장, 기자보다 더 먼거리에서 출발을 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목적지도 기자보다 두어 정거장을 더 가는 거리였구요. 그녀는 장충동에 있는 한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2학년인데 나이는 스물 넷이라더군요. 사정은 묻지 않았습니다. (기사 이어집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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