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여전사가 새만금 수호천사가 된 이유
갯벌여전사가 새만금 수호천사가 된 이유
  • 승인 2006.07.2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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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서른아홉 젊은 각시를 삼킨 새만금방조제-류기화씨를 추모하며

그녀는 새만금 갯벌의 전사였다. 그레질을 할 때면 모자를 쓰고, 수건을 얼굴까지 가리고 갯벌을 긁는다. 체게바라의 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전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총 대신 그레만 다를 뿐….


▲자신을 촛불처럼 태우며 새만금 갯벌을 살리고자 했던 류기화 씨를 추모하고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기어이 그 촛불을 꺼버렸지만, 가슴마다 더 큰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류기화 그녀는 개발과 성장의 덫을 걷어내고자 몸부림쳤다. 표만 얻으면 그만인 정치인들과 맞서 싸운 여전사였다. 마치 바다의 자궁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어머니인 바다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바쳤다.

그런 그녀가 11일 오전 9시, 서른아홉의 나이로 새만금 바다에 묻히고 말았다.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간 것일까. 새만금 바다가 그녀를 품은 것은 아니다. 방조제가 그녀의 아름다운 삶은 빼앗아 간 것이다. 4-5년의 임기를 위해 거짓환상을 심어준 정치인들의 덫에 그녀는 목숨을 잃었다.


▲가족들과 동네 아줌마들과 지인들이 살아생전의 모습이 담긴 영상물 ‘갯벌여전사’를 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장례를 마친 가족들과 동네 아줌마들, 지인들은 새만금 갯벌을 상징하는 조개, ‘생합다방’에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 ‘갯벌배움터’이기도 한 작은 방에 모인 추모객들은 살아 생전 그의 모습이 담긴 오종환 감독의 `갯벌여전사`를 보면서 떠나고 없는 그의 빈자리를 다시금 실감해야 했다. ‘갯벌여전사’ 그녀의 딸 은별이가 내레이션을 맡고 있었다.

갯벌에서 장화를 신고 그레질을 하는 그녀가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지듯 일갈한다.
“사람들이 웰빙 웰빙하는데, 그 웰빙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자연 아닙니까? 몸에 좋은 음식, 웰빙 음식이 자연 그대로의 음식이 아닙니까?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휴양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공기 좋고 물 좋은 자연 아닙니까? 갯벌은 자연입니다. 웰빙입니다. 백합만큼 좋은 웰빙이 어디 있습니까? 갯벌을 죽이면서 백합을 웰빙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지난 6월 6일 목선에서 노랑조개 선별작업을 마치고, 남편은 삽질을 하고 아내는 그물망을 잡고 있는 풍경이다. 누가 저렇게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을 생이별하게 하는가.

류기화 씨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찡그린 얼굴 한번 본적 없었노라고. 그런 그녀가 다큐에서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도 우리 시대의 양심이어야 할 대법원에서 그레를 들고서.

“어떻게 사람의 삶을 법에서 판단할 수 있습니까? 어민들 생계보장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아가라고 나머지 2.7Km를 막을 수 있습니까? 그 터진 곳으로 해수가 유통이 되어 조개를 잡아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데, 그 구간을 막으면 우리 어민들 다 죽으란 말입니까? 갯벌로 가만히 놓아두면 대대손손 조개를 캐서 살 수 있고, 갯벌을 잘 보존하면 다양한 종들의 ‘생태의 보고’가 될 수 있는데, 왜 방조제를 막아서 그 갯벌과 다양한 생물의 종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까? 세계적인 방조제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세계적인 망신거리를 만드는 거 아닙니까?”

대법원 방청석에서 그레질 복장으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에 본적이 없는 당당함이었으며, 죽어가는 갯벌을 살리기 위한 전사의 항전이었다. 양복 입은 사람들만 뉴스에서 보아온 우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솔직담백한 그의 딸 은별이의 내레이션은 백합의 하얀 속살처럼 청순했다.
“엄마는 바다를 좋아해요. 갯벌에서 생합을 잡는 엄마의 모습이 제일 예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니까요.”

그레를 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갈매기를 쫓는 엄마를 보며, 은별이의 독백으로 영화가 막을 내린다.
“엄마는 내일도 모레도 계화도 갯벌에서 생합을 잡을 것이다. 아! 엄마다!”

다큐가 끝나자 큰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갑작스런 이별 앞에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렇듯 떠나보낼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추모도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순수하고 소박하고 열정적인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픕니다. 부부는 새만금 반대 싸움에 정말 사심 없이 열심히 싸웠습니다. 주로 집회장에서 보아온 류기화 씨를 바다에서 본 건 지난 6월 6일 계화도 포구에서였습니다. 새벽 5시부터 노랑조개 선별작업을 마치고, 남편은 삽질을 하고 아내는 그물망을 잡고 있었습니다. 노동의 땀방울이 성스럽다는 말을 바다의 수호천사들인, 저 부부에게서 보았던 날이었습니다. 그랬던 부부가 새만금방조제 때문에 영원히 생이별을 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 입을 열자 사람보다 먼저 촛불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금도 곁에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던 동네 아줌마들이 눈물을 훔치며 하나둘씩 말문을 열었다.

“부부가 새만금을 위해 참으로 열심히 싸웠어요. 광운이 아빠는 새만금을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밖으로 활동을 많이 하니까, 생계문제는 광운이 엄마가 책임지다시피 했어요. 그런데도 싫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았지요. 그런 천사가 없었어요.”

지난 10-11일 이틀간 농업기반공사는 수문을 열어 방류를 시작했다. 홍수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민들에게는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동안 새만금방파제로 인해 단단한 갯벌에서 생합을 캐 하루 2-3만원 벌이에 그쳤던 어민들은 수문이 열리자 황금어장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2-3만원이었던 수입은 17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은 거기까지였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단단한 갯벌이라 안심하고 그레질을 하는데 갑자기 푹 꺼진 갯골을 만나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 바닷물 속으로 그만 들어가고 만 것이다.


▲갯벌배움터에서 생활하면서 고인과 많은 추억을 간직한 이승민(왼쪽), 이원기 두 활동가


이번에는 두 활동가가 입을 열었다. 류기화 씨를 ‘언니’와 ‘누님’으로 부르던 활동가들이었다. 아니 그들에게 류기화 씨는 삶의 스승이었다.

“보름 전에야 그레질하는 언니의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물막이 공사가 끝난 후 마른 갯벌에는 백합이 없어서 물속에서 그레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어요. 물놀이는 하는 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고 할까요. 그레에 걸린 백합을 허리를 굽혀 잡을 때면 바닷물이 언니의 목까지 차올랐는데 그땐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그건 삶의 터전을 빼앗겨버린 사람의 사투였어요.”

“밤새 술을 마실 때가 종종 있었어요. 그러면 누님은 안주며 설거지며 아무 말 없이 뒷수발을 들었어요. 어느 날 하루는 누님이 노래를 하자고 했어요. 노래책 한 권을 펴들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책에 담긴 노래를 밤새 다 불렀던 기억이 나요. 누나는 사람만큼이나 노래도 좋아했어요.”
"친누나처럼 챙겨준 기화 언니를 위해 노래 한 곡 바치고 싶습니다. ‘공무도하가’입니다."

『님아 님아 내 님아 물을 건너 가지마오
님아 님아 내 님아 그 예 물을 건너시네
아…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아…가신 님을 어이 할꼬
공무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당내공하…』

서로 시집와서 정든 동네이자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들을 헤아리고 남을 아주머니들이라고 해서 어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없으랴. 마치 ‘존경하는 사람 자랑하기 대회’에 나온 사람들처럼 동네 아주머니들은 지난 기억들을 되살려 입을 모았다.


▲자원활동가로서 갯벌배움터에서 자주 고인을 만났던 김영옥 씨, 고인이 못다 부른 노래를 부르는듯 한이 가득하다.


“광운이 엄마처럼 시어머니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을 거야. 아직은 나이도 젊고 하니 한번쯤 늙은 시어머니 흉을 볼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꼴을 못 봤어. 같은 여자여도 나는 그렇게 못 살았거든.”

“광운이 아빠 만나서 고생만 죽살라게 하고 갔어. 옷 한번 반듯하게 입은 것을 못 봤어. 연지곤지는 고사하고 루즈 한번 바른 것 못 봤고, 머리 파마한 모습도 못 봤어. 늘 단발머리니까 집에서 가위로 혼자 잘랐어. 그래서 그런지 더 불쌍하고 더 눈에 밟혀. 오늘 화장터에서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데, 광운이 엄마가 천사처럼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어.”


▲한 동네에 시집와서 고은 정만 들었던 동네 아줌마들, 기화 씨를 잃고 빈자리가 가장 큰 사람들이다.

으레 상가에서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성을 보면 품성을 알 수 있듯 유기화 씨는 생합이었다. 그 생합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그곳이 어디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새만금을 사랑하고, 갯벌을 사랑했다. 단순히 밥을 벌어주는 바다가 아니라 자신의 시야와 정신을 넓혀주는 바다를 사랑했다.


▲아직은 엄마에게 재롱을 부릴 중2 은별, 해맑은 미소처럼 건강하게 자라길 기도한다.


그 누구보다 바다를 사랑한 여자, 류기화 씨. 이제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녀는 결코 여전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본에 눈멀고, 정치에 눈먼 그들이 삶의 구렁텅이로 그를 밀어 넣었다는 것을! 그녀는 바다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아니라 바다를 사랑하는 한 여자이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의 딸처럼 바다를 사랑하며 열심히 살았던 그녀의 삶을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그렇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빼앗아가는 우리 사회는 미래가 있는 것일까. 참소리=최종수 신부 기자

 
▲아직은 엄마에게 재롱을 부릴 중2 은별, 해맑은 미소처럼 건강하게 자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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