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딸과 함께 떠난 남양주시 천마산-2회

딸아이 투덜거림, 점점 더 심해집니다. 경사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급합니다. 투덜거리는 소리는 경사와 정비례합니다. 어떤 대상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아이고, 내가 왜 이런 산엘 따라왔는지…." 하는 식의 자조가 대부분입니다. 처음 들을 때는 웃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끈덕지게 머리 뒤통수를 따라다니며 간질이는 그 소리. 맥이 빠집니다. 처음엔 대꾸를 하다가 나중엔 할 말을 잊습니다.

계곡이 있는 등산로 초입과는 달리 이곳은 낙엽송들이 지천입니다. 소나무 종류인데 이파리가 엄청 가늘게 생겼습니다. 부드럽기도 하지요. 산 아래쪽의 잣나무나 전나무와는 많이 다릅니다. 노오랗게 익은 소나무 이파리들이 산산히 흩어져 내리는 게 장관입니다.




#낙엽송

물론 딸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만, 넌지시 한 번 말을 건네봅니다.
"야, 이게 뭔지 알어?"
"아…몰라, 몰라."
"진짜 멋있지 않냐?"
"내가 산엘 왜 따라왔는지…."

동문서답입니다. 빙긋이 웃고 포기하는 수밖에요.

어라? 그런데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일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잘 하면 딸아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있는….

저 아래쪽에 다른 등산로가 있는 걸 발견한 것입니다. 부부로 보이는 한 중년남자와 여자가 그 길로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쪽의 급경사길과는 천지차이입니다. 평탄한 길이 마치 산책로 같습니다.

"저 쪽으로 갈래?"
딸아이도 눈이 똥그래 집니다.

"왜?"
"저쪽이, 훨씬 더 편할 것 같아. 어쩌면 정상에 빨리 오를 수도 있고…."

"그쪽으로 가면 암벽이라도 있나?"
"글쎄, 잘하면…."

딸아이는 암벽을 좋아합니다. 무작정 걷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빨리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몇차례 암벽을 타 본 일이 있는데, 그때까진 축 처져서 걷다가도 갑자기 날아다니기라도 할 듯 힘을 내더군요.

딸아이, 말 끝나기도 전에 앞장 서 그 길로 접어듭니다.
하지만 이게 왠일, 잠시 평탄한 길이 이어지는 가 했더니 이내 다시 급경사…. 다시 이어지는 딸아이의 투덜거리는 소리. 와아, 미치겠습니다 정말….


#타오르는 마지막 가을의 단풍

게다가 초행길이다 보니 종종 한번씩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돼?"하고 물어오는 딸아이의 질문에 답변할 처지도 못되니…. 그저 "조금만 더 가면 돼"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맨날 조금만 더 가면 된대"라는 준비된 칼날에 가차없이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코스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딸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암벽은 구경조차 힘들고, 다 올랐다 싶으면 다시 내려가고, 또 올라가나 싶으면 다시 내려가는 지루한 반복이 지속됩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니 어느덧 저만치 정상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얏호, 저기가 정상이다."
당연히 딸아이 눈 커지죠.

"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글쎄, 한 10분…."

망언이었습니다. 거기서도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무려 40여분을 더 걸어서야 도착한 게 정상도 아닌, 정상 아래 바위샘이었으니…. 바위샘에서도 약 10여분 더 올라야 정상입니다. 바람이 세차게 붑니다.


#바위샘입니다.

바위샘 근처에 등산객들이 여럿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어린애 둘을 데리고 온 부부도 있습니다. 눈짓으로 그 아이들을 가리키니, 딸아이 눈에 힘을 줍니다. 목소리도 물론입니다.

"쟤네들은 쟤네들이고…."

입 닫아야지요. 그래도 눈앞이 정상인데 올라야죠. 딸아이 말 없이 앞장 서 오릅니다. 그런데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집니다.

"저기 올라가면 밥 먹을 때는 있지?"
"글쎄, 바람이 많이 불어서…."

딸아이의 연이은 공격에 주눅이 들었나봅니다. 갑자기 마음이 약해집니다. 거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부니 밥 먹을 장소가 마땅치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만 내려갈까?"
"그래…."
답변 간단명료합니다.

다시 바위샘으로 내려와 목을 축이고, 빈 물통에 물을 채웁니다. 이제부터 오남리 방향으로 하산해야 합니다. 적당히 좋은 자리, 바람이 불지 않고 따뜻한, 그런 자리를 찾아 식사부터 해야지요.

역시 하산로는 낙엽들로 뒤덮여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대충 눈짐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만치 썩 괜찮은 자리가 보입니다. 낙엽들이 쌓여 있고 한쪽은 바위가 있어 바람을 막아줄 것 같습니다.

딸아이 어느새 기분이 풀렸습니다. 항상 내려갈 때는 풀리지요.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을 풀어놓습니다. 제가 직접 준비한 제육볶음에, 아내가 싸준 각종 반찬들. 딸아이 눈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일부러 큰 도시락을 건네니 "아냐, 그건 아빠가 먹어"라고 인심까지 쓸 여유도 생겼나 봅니다.

"정말 꿀 맛이다."
먹을 때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산에는 멧돼지가 나온다는데…."
언젠가 이쪽 코스로 하산을 하다가 만난 한 등산객으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입니다.

"오호, 그래? 그럼 잡아 먹으면 되겠군."
할 말 없어집니다.


#하산하는 길에 마주친 희귀하게 구부러진 나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하산합니다. 계곡을 따라 계속 걷습니다. 등산객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를 약 한시간여 드디어 조그마한 마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여기가 오남읍 팔현2리입니다. 팔현저수지로 유명하죠. 음식점들도 많구요.


#하산길, 갈대밭에서 딸아이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서울 가는 버스를 타려면 이 마을에서도 약 40여분은 더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서….


#팔현리의 한가한 농촌풍경

딸아이, 다시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는 차들한테도 괜한 시비를 겁니다.


#팔현리,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

"저 차는 왜 저 꼬락서니로 운전을 하는 거야."
딸아이 얘기, 그대로 옮겨본 것입니다.
"내 다시는 이 산에 오나 봐라."
버스 정거장까지 총 5시간30분 걸렸습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