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중도사퇴 '블랙홀 정국' 누가 유리할까

고건 전 총리의 `중도 탈락`은 예고된 수순이었을까. 1년 전만 해도 고 전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며 여권의 `히든 카드`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치고 올라오며 마침내 역전했지만 고 전 총리 진영에서는 "그래도 신당 만들면 달라질 것"이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놨었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으로 잡혀있던 고 전 총리의 지지모임, `희망연대`의 출범이 몇 가지 이유로 한 두 차례 연기되면서부터 불안한 분위기가 조트기 시작했다. 고 전 총리가 연말 `통합신당 창당`으로 불꽃 재점화를 노렸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제동 발언도 고 전 총리측의 부담을 높여주는데 중요한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 전 총리의 갑작스런 중도 사퇴는 누가 봐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 전 총리가 제외된 블랙홀 정국에서 대선 잠룡들의 손익계산서를 분석해 봤다.

"고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통합신당론은 공식 폐기돼야 한다."
고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으로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특히 다음 달 전당대회에서 이를 논의하려는 열린우리당의 고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선도탈당하겠다`, `고 전 총리를 지지한다`던 의원들의 목소리도 고 전 총리의 퇴장에 머쓱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급기야는 당의 싱크탱크인 열린정책연구원 토론회에서 신당론폐지 주장이 제기됐다. 고원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와 관련 "고 전 총리의 불출마는 통합신당론의 시도가 갖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면서 "과거회귀, 상층부의 이합집산, 세력중심의 판짜기 시도를 통해선 현재 여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의 불출마 선언은 정치권에 상당한 후폭풍을 남기고 있다.
일단 범여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통합신당론`이 휘청할 수 밖에 없는 대위기를 맞게 됐고 `제3후보론` 또한 날로 뜨거워질 전망이다.

정치권에선 일단 고 전 총리 불출마 배경을 놓고 백가쟁명식 해석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고 전 총리 자신은 "대결 구도 위주의 현실 정치에 한계를 느꼈다"고 입장을 표명했지만 그래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다.
특히, 한나라당에선 모종의 의도가 담긴 `음모론` 아니나며 경계의 눈초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정진섭 기획위원장은 이에 대해 "단순히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권력의 작용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면서 "표면적 이유와는 달리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김정훈 정보위원장도 "이번 문제는 여권의 후보구도 정리작업과 연계시켜서 봐야 한다"면서 "본인 스스로의 결단만으로 사퇴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에서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 데에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통합신당`의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분위기도 한 몫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음모론` 대해 고 전 총리 측에선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얘기"라며 일축하고 있다. 고 전 총리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한 인사는 "지난해 7월 각혈 증세를 보여 6개월 정도 투약하면서 치료를 받았다"면서 "당시 병원측에서 절대적 안정을 권유해 두 달간 활동을 중지하기도 했다"고 건강문제를 거론했다.

고 전 총리의 결단에는 가족들의 반대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부인인 조현숙 여사를 비롯해 자제들 또한 대선 출마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현숙 여사는 고 전 총리가 참여정부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됐을 당시에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건강을 위해 이제 그만 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었다.
이 외에도 범여권과 고 전 총리 진영에선 여당의 움직임이 기대했던 것보다 수위가 떨어진데다 자금 부족 등 문제가 겹친 것도 고 전 총리가 발을 빼는 원인이 됐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친고파인 신중식 의원은 SBS라디오에 출연해 "지난해 말 난데없는 노 대통령의 모독적 발언에 고 전 총리가 황당해 하면서 충격이 있었던 것 같다"면서 "여당 내의 부정적 비판, 정치권에 대한 고 전 총리의 이해부족, 참모들의 전략 부재" 등을 거론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관심은 고 전 총리의 불출마로 대선 구도가 어떻게 재편되느냐에 모아진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위를 달리던 그의 부재는 일단 한나라당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고 전 총리의 불출마 발표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고 전 총리 지지자들은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등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줬다.
문화일보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고 전 총리 지지층 가운데 3분의 2 가량인 68.3%가 한나라당 후보군으로 이동했다. 같은 조사의 `고 전 총리의 불출마로 어느 주자가 가장 유리할 것으로 보는가`라는 항목에도 이 전 시장이 51.9%로 가장 높게 조사됐고 박 전 대표와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이 각각 20.5%와 7.4%로 뒤를 이었다.

열린우리당 잠룡군에서 정 전 의장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전망은 다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CBS와 리얼미터가 지난 16일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 전 의장은 일주일 전 조사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폭인 3.6%가 상승했다. 이 조사는 고 전 총리를 지지했던 유권자들만을 대상으로 범여권 후보 선호도도 조사했는데 여기에서도 정 전 의장이 21.1%로 가장 높게 조사됐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10.7%, 김근태 의장 8.7% 순이었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고 전 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호남 민심이 급격히 흔들리기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으로 해석된다. 고 전 총리가 호남에서 상당한 강세를 보여왔던 만큼 전북 출신인 정 전 의장이 반대급부를 입고 있다는 주장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고 전 총리의 중도 낙마로 인해 통합신당과 대선 로드맵에도 대거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 전 의장이 상승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미흡한 수준이고 김 의장 또한 저조한 수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과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박원순 변호사 등 이른바 제3후보의 등장 가능성을 점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고 전 총리의 불출마로 기존 잠룡인 정 전 의장과 김 의장 모두 입지가 위축되는 상황을 낳게 됐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고 전 총리의 불출마 최대 수혜자로 한나라당 손학규 전 지사를 지목하고 있다.

당장은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 등 한나라당 빅2에 표가 쏠리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장 비슷한 성향의 손 전 지사가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는 해석이다.

손 전 지사는 `중도적 노선`과 `통합`이라는 화두로 볼 때 고 전 총리와 가장 비슷한 이념적 성향을 지닌 잠룡으로 평가받아왔다. 지난해 말부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서 손 전 지사에 대한 공개 구애가 나왔던 것도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다. 그는 또 당내 대선 주자들에 비해 남북관계 개선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여온 데다 "노 대통령을 도와주고 싶을 정도다"는 발언을 내놓은 바 있다.
고 전 총리 중심의 `통합신당`을 준비해온 의원들 일부도 제3지대 신당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손 전 지사를 후보군에 넣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손 전 지사는 이와 관련 "지금 할 얘기는 아니지만 이번 대선에선 통합할 수 있는 리더십이 나와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면서 " 전국적인 통합을 꾀하고 좌위 이념적인 통합을 꾀하는 것이 내가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이라고 말해 가능성을 열어뒀다.
고 전 총리의 불출마가 한나라당 일방 독주의 현재 상황을 더욱 고착시킬지, 아니면 범여권 부활의 계기가 될 지 관심이 모아진다. 일단 무게추는 손 전 지사에게로 집중되고 있다.
유상민 기자 uporter7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