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두개의 풍경

풍경 하나-매화

“곱다 !”
꽃이 창조하고 있는 세상은 별천지다. 회색빛 겨울 모습과 대조가 된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한꺼번에 모두 몰아낸다. 하얀 꽃잎이 은은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어찌 그뿐인가. 하얀 바탕에 노랑 빛 모자를 쓴 암술과 수술의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다.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겨울 속에서 꽃을 피워내고 있다는 점이 감동이다. 모두가 아직 고개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삭풍은 어쩔 수 없이 밀려가면서도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 여력이 아직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맹위를 떨치던 때의 매서움을 잊지 않고 있는 모든 것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리고 있다. 그런데 매화만이 당당하게 얼굴을 내민 것이다.

앞선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다는 말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감을 상실한 채 머뭇거리고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달걀을 깨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것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활짝 피어낸 매화가 가슴에 꽂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매화의 용기가 있기에 봄이 올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들처럼 모두가 주저하고만 있으면, 봄은 멀기만 할 뿐이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찾아가고 싶은 봄도 어찌할 수가 없다. 세상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겨울은 시련이다. 모든 생명들이 깊은 곳으로 몸을 잠시 피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그 것은 정지되어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준비하는 기간이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련을 통해 갈고 닦는 기간이다. 그러나 너무 안이해서는 안 된다. 안전한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꽃을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길을 닦아 놓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때를 놓치는 것이다. 잘 닦여진 길은 가기에는 편안할지는 모르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적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은 매화가 만들어내는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가야 하는 것이다.

매화의 세상은 정말 우뚝하다. 몸과 마음을 모두 빼앗길 정도이다. 환한 세상에 취해 있으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일상의 단조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새로움이 넘쳐나고 있다. 겨우내 시련과 고난으로 인해 움츠리고 있던 가슴이 빳빳하게 서진다. 편안하게 숨을 쉴 수가 있다. 올 한해 내내 이렇게 흥겨움이 지속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화가 데리고 온 봄이 환하게 웃는다. 온 몸에 전해지는 부드러움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어찌나 감미로운지 흐트러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속이나, 규제는 모두 벗어버린다. 온 몸에 들어 있는 모든 힘을 빼버리게 한다. 겨우내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멍에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가벼워지는 마음에 날개를 단 것 같다.

그 것은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질 뿐이다. 느끼는 것만으로 통통 튀어 오르고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둥둥 떠오르는 것이다. 그 것은 봄의 마법이요, 봄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의식과 몸을 내버려두어도 그렇게 편안하고 즐거울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니, 가볍게 날아오른다. 시선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온다. 멀리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바람에 꽃이 흔들리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흘러가는 강물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거슬리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걱정하는 마음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들어올 틈이 아예 없다.

풍경 둘-빈 배
 
지난 20일, 섬진강에 빈 배가 떠 있다. 사공도 봄을 즐기러 나간 것이 분명하다. 따뜻한 햇살로 인해 안온함을 찾아 나선 것이 확실하다. 아무도 타지 않은 하늘 색 배가 강물에 흔들리고 있으니, 묘한 정취가 일어난다. 원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흔들리는 물결에 모두 맡기고 있었다.

무엇이든 꼭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면 완벽함을 이룬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부조화가 일어난다. 아귀가 맞지 않은 문짝은 바람을 제대로 막아낼 수가 없다. 문으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또 때를 맞추었을 때 더욱 우뚝해질 수 있다.

강물에 흔들리고 있는 빈 배는 그 때와 장소를 분명히 잘 알고 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저기에 작은 것 하나라도 더해도 볼품이 없었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빼게 되면 부족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시나브로 찾아오는 봄에 섬진강에 매어져 있음으로 무심을 완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고 하였던가. 봄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신을 가을 서리처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빈 배가 무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있음을 뜻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완벽을 추구한다면 그 것은 모래성과 다를 것이 없다. 우뚝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섬진강에 흔들리고 있는 빈 배를 바라보면서 춘삼월 호시절을 실감한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다가온 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때다. 지난 일에 집착하게 됨으로서 불행해지고, 도래하지 않은 내일의 일로 근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빈 배처럼 오늘 이 순간의 소중함을 알아야 현명하다.

keesan@hanmail.net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한국아동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월간 아동문학 신인상, 월간 문학세계 신인상, 녹색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북 대덕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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