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연재> 고홍석 교수의 산내마을 '쉼표찾기'

`Weekly서울`이 연재하고 있는 `쉼표 찾기`는 오랜 학교생활과 사회활동 후 안식년을 가졌던 전북대 농공학과 고홍석 교수가 전북 진안군 산내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고 교수는 2004년 3월 전북 전주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이 한적한 산내마을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갔다. 고 교수의 블로그에도 게재된 이 글들은 각박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아주 좋은 `쉼표` 찾기가 될 것이다. 고 교수는 `Weekly서울`의 연재 요청에 처음엔 "이런 글을 무슨…"이라고 거절하다가 결국은 허락했다. `쉼표찾기`를 위해 산내마을에 들어간 고 교수는 지금도 시끄러운 정세와 지역현안들로 바쁜 사회참여활동을 하고 있다. <쉼표 찾기>를 통해 산내마을에서의 생활과 사회를 보는 시각을 적절히 섞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Weekly서울`은 고 교수가 부인과 함께 산내마을로 이사를 가기 직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쓴 모든 글과 사진들을 거르지 않고 연재하고 있다. 때론 낙엽지는 시기에 새싹 피어나는 이야기를, 눈 내리는 한 겨울에 여름 무더위 이야기를 접하는 일도 있겠으나 그 또한 색다른 재미가 될 듯 싶어 빼놓지 않고 게재한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풍경 소리, 댓잎 사각거리는 소리 (12/14) 

풍경은 중국에서 전해 들어온 목어나 목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경세의 의미를 것으로, 밤에도 눈을 뜬 물고기의 모습을 본떠 처마 끝에 걸어둠으로써 수행자의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불구(佛具)의 하나입니다.
그런가 하면 선비들의 시정(詩情)을 돋우고 나그네의 여정(旅情)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승주 조계산 불일암에 가면 큰바람에만 소리 내어 `태풍의 대변인`이라고 이름 붙인 풍경이 있는데 웬만한 선들바람에는 과묵하다고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지만 우리 집 처마 밑에 풍경은 사연이 있습니다. 산내마을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절에서 간혹 풍경을 보았어도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풍경의 생김새를 눈여겨 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풍경과 소의 턱 밑에 다는 풍경 모양의 방울인 쇠풍경을 구분하지 못하여 골동품상에서 쇠방울을 풍경이라고 샀습니다. 풍경과 쇠방울은 모양도 모양이려니와 소리도 전혀 다릅니다. 아내와 풍경과 쇠방울 들고 흔들어대며 소리도 들어보고, 쇠방울은 소라도 된 듯 서로의 턱밑에 대고 흔들어보고, 그리고 음매∼ 소울음 흉내도 내보기도 하였습니다. 아내는 쇠방울 때문에 소가 시끄러워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겠느냐며 걱정입니다. 글쎄, 잘 때는 주인이 쇠방울을 떼어 놓았을까 나름대로 맘껏 상상도 하였습니다.



블로그에서 저를 가리켜 <쉼표 아제>라고 부르며 재미있고 자상스러우면서도 고상한 댓글을 달아 주시는 <꼬모님>께서 풍경을 그려 보내주시고 시까지 달아 놓으셨습니다. 풍경 그림을 보고 어줍잖게도 풍경 소리는 푸른 느낌이어야 한다며 배경을 푸른색으로 하는 풍경을 한 장 부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푸른 풍경 소리의 두번째 그림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어믄 풍경/ 우는 소리에/ 잠깨어/ 뒷문 열고 내다보니/ 어스름 달밤은/ 제 그림자 감추고 누워/ 잠 못 들고/ 부산하나/ 새벽닭 우는 소리/ 삼경을 깨우누나
그리운 님/ 고운 숨결/ 이다지 그리운고.
 <글 : 산호초>

제가 사는 산내마을은 해발 400미터에 위치하고 있어 금년 겨울이 이상 고온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에는 돌확에 얼음이 얼어 있습니다. 두꺼운 옷을 걸치지 않고 마당에 나서면 한기가 스며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가움이 머리를 맑게 해 주는 것 같아서 울안을 서성거립니다. `초겨울의 새벽 기운이 내밀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느낌이 실감이 납니다.

그런 새벽에 살랑거리는 바람에 풍경 소리가 들리면 그 청아한 소리만큼이나 영혼까지도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뒤안의 대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소리로 협주를 하면 영혼의 오케스트라가 따로 없습니다. 이런 새벽이면 다시 한번 마음을 다그쳐 봅니다. 이 풍경 소리가 <쉼표>가 <마침표>가 되지 않도록 방일과 나태함을 깨우쳐 식어가는 가슴을 후끈하게 데워주었으면 합니다.

가을 무서리가 이제는 된서리로 내려 새벽이면 마치 눈이 온 것처럼 야트막한 앞산이 온통 하얗습니다. 서리가 내리면 식물들은 속이 곯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서리가 내리는 것은 이제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며 그 겨울 동안 쉬라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에게도 쉰다는 것은 마침표를 찍고 눌러 앉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오히려 더 강하게 담금질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름의 비가 만물을 키우듯이 늦가을 서리와 겨울 눈은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단련시켜 성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벽 닭 우는 소리, 풍경 소리, 대숲을 가르는 바람 소리에 잠깨어 나선 마당에서 <꼬모님>의 시를 읊조리면서 `그리운 님 고운 숨결`, 그 사랑의 대상을 정철의 `사미인곡` 그 님과 대비하여 봅니다. 대나무는 선비의 기개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생 배불리 먹지 못하여 속이 텅빈 배곯고 죽은 민중의 넋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굳이 사족을 달자면, 정철의 그 님이 군주였다면, 내가 그리워하는 그 님은 민중이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 바로 민중이어야 합니다.  
 

▲  왼쪽이 쇠방울, 오른쪽이 풍경


▲  우리 집 뒤안의 대나무 숲

떠남이란 만남의 시작이니…(12/18)

우리 집 업둥이 아기 고양이 <또치>는 사흘 전 우리 집 바로 옆 폐가에서 데려 왔습니다.  그날 아침에 마당에 나서니 어디선가 아기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려서 여기저기 살펴 보니 옆집 헛간에서 크기가 어른 주먹만한 아이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야옹∼하고 고양이 소리를 내자 그 녀석이 비척거리면서 이쪽을 향해서 마치 어미를 찾았다는 듯이 오는 것입니다. 망설이다가 데려와서 먹을 것을 주었더니 허겁지겁 먹는 것이 애처롭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미를 잃은 것인지, 아니면 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또 다른 새끼들은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망설였다는 것은 그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우리 내외는 작년까지 17년을 함께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 <단비>라는 개로 인한 마음 아픔 때문에 다시는 동물과는 정을 나누지 않겠다고 다짐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길냥이들은 개들과는 달리 사람과 정을 서로 나누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사료를 날마다 주고 그리고 그 녀석들이 들락거리면서 먹고 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부담없이 정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을 나누는 것을 꾸짖기라고 하듯이 아기 고양이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미가 나타나서 데리고 가거나, 제 발로 제 갈 길을 갈 때까지는 정붙이고 또 함께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이 녀석이 우리 내외를 불러냅니다. 사실은 그 녀석 입장에서는 귀찮고 두려울 터이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경쟁하듯 우리 내외가 시간만 나면 들여다 보면서도 그 녀석이 불러낸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신앙의 근본은 무엇인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신앙을 갖기 전부터, 그리고 영세를 받고서 믿음을 갖게 된 후에도 수없이 자문하고 묵상하는 명제입니다.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태어남,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떠올리면 묵상까지도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김남주 시인의 <사랑이란> 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아는` 그러한 죽음만이 부활하며, 그리고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아는` 그러한 나눔만이 참 사랑을 실천한다고 다짐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미리 예견한 십자가 사건은 참다운 십자가 사건일 수 없습니다. 부활이 미리 예견되었다면, 십자가에 매달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팽개치고 도망치는 제자들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십자가 사건의 현실은 바로 절망, 치욕, 아픔, 그리고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절망, 치욕, 아픔, 죽음이 있어야만 부활을 예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미 우렁이는 자기 속에 새끼를 배어 그 새끼들이 자기 창자를 다 뜯어먹고 자라게 하고서 자기는 빈 껍질만 남아 물 위에 떠갑니다. 자기 창자를 다 뜯어먹게 해야만 새끼들이 자라는 것처럼, `제 뼈를 갈아 재를 뿌려`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하여야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압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활의 어원이 되는 `아나스타시스` `에게이로`의 뜻이 `맞서 일어나다`라는 것은 비록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죽음이 또 다른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주체로 나서게 됩니다.

우리 역사를 더듬어 보면, 민족해방의 길에서 이름없이 쓰러져간 독립군들, 의병들, 농민군들, 빛고을 광주 영령들, 민주통일 열사들의 넋이 살아있는 칼날로, 살아있는 죽창으로, 민중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허리를 두동간 낸 제국주의와 민중을 수탈하는 다국적 독점자본과 피비린내 나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반공반북 민족분단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우는 죽창으로, 돌멩이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누는` 사랑, 진정한 나눔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베풂과는 본질적으로 의미가 다릅니다. 베풂이란 자신이 다 쓰고 남은 것을 시혜적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만과 보상감이 따르게 그것이 없으면 베품마져도 버리게 마련입니다. 뇌물로 받은 돈에서 일부를 성전 신축금 또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는 경우도 나눔의 실천이라도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눔이란 내게도 부족한 것을 여럿이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김남주 시인의 `사랑이란` 시를 조용히 읆조리면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사과 하나 둘로 쪼개는 사랑`이 내 차가워진 심장을 참 사랑으로 끓게 하여, 주변의 가난한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부둥켜 안을 수 있도록 기도해 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불의와 부패와 부정에 맞서 일어나며 `제 뼈를 갈아서 재를 뿌리는` 부활의 의미를 새겨 봅니다.

가을이면 나무들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여름 내내 걸쳤던 두터운 이파리들을 본래의 대지로 떨굽니다. 살바람 에는 추운 긴 겨울을 이기고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무들은 죽어야만 부활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글 뒷 부분은 예전에 블로그에 실었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온 매스컴이 나눔과 베풂에 대해서 지면과 화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인지, 이 의미를 다시 한번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소위 `리바이벌`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날을 몇일 앞두고, 우리 내외에게 성탄 선물처럼  찾아온 업둥이 아기 고양이 <또치>가 탈없이 잘 커서, 그리고 우리 품을 떠나 산내마을을 휘젓고 다녔으면 합니다. "우리 품을 떠나"라는 글을 쓰면서 못나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단비>가 우리 품을 떠나고 나니 <또치>가 왔듯이 떠남 그리고 보냄이 곧 만남의 시작임도 불구하고, `떠남`이나 `보냄`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떠남 중에서 사별처럼 가슴 아픈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자의 가슴은 그 떠남을 보내지 못하니 가슴이 아릴 수밖에….



▲ 아기 고양이 <또치>가 발견된 옆집 헛간.


▲ 햇볕을 쬐러 마당으로 나가는 <또치>, 이 과정에서 <또치>가 아내 손을 물어 피가 났습니다. 예리한 발톱을 다 드러내고 발버둥을 치며 앙탈을 부리고 있지만, 우리 아기 고양이 <또치>가 엄청 앙증맞고 귀엽지요????   


▲ 김남주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과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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