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번뇌, 꽃비 내리는 산사에 두고 오다
켜켜이 쌓인 번뇌, 꽃비 내리는 산사에 두고 오다
  • 승인 2007.05.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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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정명은 기자의 서울인근산 샅샅이 훑기-북한산

눈이 부시다. 부셔질 지경이다. 서울 수유리 4.19민주묘역을 지나 통일연수원쪽으로 오르는 길. 흐드러진 꽃들, 연초록으로 빛나는 나무들. 눈을 뜰 수가 없다. 토요일 오후. 태양이 빛난다. 역광이 투영된 꽃잎이, 나뭇잎이 몸과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는다. 싱숭생숭해진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할 수 없다. 입고 있던 겉옷이라도 벗어제끼는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무슨 사고라도 칠 것만 같다.


#등산로 입구의 대동교와 음식점들

북한산. 이번엔 통일연수원에서 오르기로 했다. 표를 팔지 않는 매표소에서 직원 두명이 인사를 건넨다. 인사말은 "라이터와 담배는 꺼내 두고 가세요"다. 대답 대신 신문을 건넨다. 골초인 기자지만 산에선 절대 라이터도 담배도 꺼내지 않는다. 좋은 공기가 흡연 욕구 자체를 불식시키는 것이다. 오른편에 북한산관리사무소 수유분소가 있다. 조용하다.

몇걸음 더 걸으면 다리가 나온다. 대동교다. 대동교 아래 조그마한 계곡이 흐른다. 계곡가로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매표소 안에 음식점이라…. 그래도 계곡물이 깨끗해 보여 다행이다. 아카데미하우스 지나 대동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나오는 구천폭포가 그 발원지다.

뒤가 시끄럽다. 고개를 돌려보니 양복 부대다. 구두까지 신고, 산에 오르고 있다. 의아하다. 낯선 광경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팔지 않다보니 이젠 저런 차림으로도 산에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근처에 왔다가 그래도 산이 있으니 잠깐이라도 들러보자는 심산인 걸로 생각했다. 그 생각, 착각이었다. 다리를 건넌 이들 조금 더 기자 뒤를 쫓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진다. 바로 옆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이런…왜 그 생각을 못했지. 음식점 옆엔 `토종닭, 개고기 팝니다`란 간판이 선명하다.


#이름모를 꽃들로 넘쳐나는 환희

숲엔 환희가 넘쳐난다. 온갖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있고, 연초록의 나뭇잎은 계속해서 소요를 일으킨다. 귓가에서 윙윙 거리는 벌들의 소요도 신경 쓰인다.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하얀 꽃들 뿐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분다. 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꽃비가 내린다.


#물 반 꽃 반... 


#하늘을 뒤덮은 하얀꽃

이쪽으로 오르는 길은 단조롭다. 도심을 내려다볼 기회가 없다. 능선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사도 급한 편이다. 계속해서 계단이 이어진다. 나무나 시멘트 계단이 아닌 게 다행이다. 돌계단이다. 그래도 걸음이 퍽퍽하긴 마찬가지다.


#가람 김병로 선생의 묘지

약 15분여 걸으면 오롯하게 자리한 무덤 하나가 발길을 붙잡는다. 안내판을 읽어본다. 가인(佳人) 김병로 선생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병로 선생은 애국선열이다. 일제시대 안창호 오동진 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무료변론에 앞장섰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와 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오는 24일은 부처님 오신날

산행길엔 연등이 줄을 지어 매달려 있다. 부처님 오신날이 가까워오나 보다. 두 개의 암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이름을 모른다. 두 번째 만나는 암자는 운가암이다. 표지판 위쪽에 조그마한 글씨로 `부처님이 계시는 이곳에 모든 번뇌는 두고 가시길…`이란 글귀가 써 있다. 그래 켜켜이 쌓인 속세의 번뇌, 오늘 이곳에 모두 내려두고 가리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운가암. 모든 번뇌는 이곳에 내려놓고 가시길...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꽃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벌들의 소요도 이어진다.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싸온 음식을 나눠먹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보기좋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자세까지 취해준다.


#나란히 등산에 나선 가족

그렇게 40여분, 드디어 능선이다. 진달래능선. 이곳의 진달래는 이미 진 모양이다. 간혹 시들하게 고개를 떨군 커다란 철쭉만이 남아 등산객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는다.


#진달래능선의 갈래길


#철쭉

좌회전해 조그마한 암벽 사이를 올라 약 5분 더 오르면 대동문이다. 기자는 다른 길을 안다. 마치 오솔길을 연상케 하는 길이다. 가벼운 발걸음에 콧노래가 나온다.
 



#고비? 고사리?

기분이 좋다. 대동문까지 오를까 하다가 생각을 접는다. 대동문에서 내려오는 우이동 방향 하산길로 접어든다. 여긴 2년여전 화재가 났던 곳이다. 아직도 화마의 흔적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하산길은 소귀천을 따라 이어진다. `소의 귀`에서 따온 것인데, 우이동의 `우이(牛耳)`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힘차게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귀천 계곡에 물이 힘차게 흘러내린다. 어린 아들과 함께 온 어느 아주머니가 카메라를 내밀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흔쾌히 응한다. 기분이 좋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은 어린 아들에게 더 없이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약수터도 물이 콸콸 넘친다. 용담수다. 생태탐방로에도 화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 위엔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고 있다. 자연의 신비다.

그렇게 약 40여분을 내려오면 마치 궁궐을 연상시키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집들과 만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요정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한정식집, 최근엔 할렐루야 기도원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할렐루야 기도원 입구에 전시된 수레


#하산길의 계곡과 분홍색 꽃

그 끝에서 990원짜리 칼국수를 판다. 가격 뿐 아니라 맛도 좋다. 등산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수레가 눈길을 끈다. 총 1시간 30분 걸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뿌듯한 산행이었다. 번뇌도 내려놓고, 꽃비도 흠뻑 맞은….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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