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연재> 고홍석 교수의 산내마을 '쉼표' 찾기

`Weekly서울`이 연재하고 있는 `쉼표 찾기`는 오랜 학교생활과 사회활동 후 안식년을 가졌던 전북대 농공학과 고홍석 교수가 전북 진안군 산내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보고 느낀 점들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고 교수는 2004년 3월 전북 전주시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이 한적한 산내마을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갔다. 고 교수의 블로그에도 게재된 이 글들은 각박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아주 좋은 `쉼표` 찾기가 될 것이다. 고 교수는 `Weekly서울`의 연재 요청에 처음엔 "이런 글을 무슨…"이라고 거절하다가 결국은 허락했다. 고 교수는 <쉼표 찾기>를 통해 산내마을에서의 생활과 사회를 보는 시각을 적절히 섞어 독자들에게 들려드리고 있다. `Weekly서울`은 고 교수가 부인과 함께 산내마을로 이사를 가기 직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쓴 모든 글과 사진들을 순서대로 거르지 않고 연재해 왔다. 하지만 때때로 지나치게 시기와 맞지 않는다는 독자님들의 지적에 따라 앞으론 간혹 누락되는 내용이 있더라도 가급적 시기에 맞춰서 연재할 계획이다(작은 제목 괄호옆 날짜가 글을 쓴 날짜임). 누락되는 부분은 이후 다시 게재해 드릴 계획이다. <편집자주>

살아있음이 부끄러운 오월(4/30) 

작년, 뒤안의 배나무 두 그루를 앞마당으로 옮겼습니다. 봄이 되어 울안의 나무들이 서서히 움을 트이기 시작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과연 옮긴 배나무가 무사히 살아서 꽃을 피울 것인지 걱정이었습니다. 터 잡고 살던 곳에서 강제 이주를 당했으니 분명 몸살 앓을 것이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염려였습니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죽은 듯이 보였던 가지에서 초록색 움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화들짝 꽃이 피었습니다. 꽃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라는 싯귀가 흥얼거려집니다.


▲  배꽃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우는 4월(잎새달)이 지나고 마음까지도 푸른 5월(푸른달)입니다. 울안에 있는 식구들, 나무와 풀들도 꽃도 피우고 잎도 제법 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한가지 걱정이 있다면 비싸게 사다 심은 능소화가 전혀 움이 트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여 아침 문안 인사가 배나무에서 능소화로 바뀌었습니다.


▲  산당화

각시꽃이라고 불리우는 산당화는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못 먹는다고 하지만 작년에 한 톨 열리지 않았던 꽃사과도 뽀얀 꽃을 달고서 장승원두막 곁에서 아련함을 뽐냅니다. 지난 해 고사리 꺾으러 갔다가 무덤가에 피어 있는 할미꽃을 보고 뒤안으로 옮겨 심었는데, 철쭉 사이에서 그 전형적인 구부러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  꽃사과


▲  할미꽃

광양 매화 마을에 놀러 갔다가 사온 들꽃 금낭화가 사진을 찍어 놓으면 이리도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꽃잔디도 질세라 한껏 보라색을 뽐냅니다. 꽃을 손으로 만지고 코로 가져가면 그 향기가 은근합니다. 꽃뿐만 아니라 봄소풍 나온 달팽이도 몸통을 길게 빼고 느릿느릿 걷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시 봄은 계절의 여왕인 것이 분명합니다.


▲  금낭화, 실물보다 사진을 찍어 놓으면 어쩌면 이리 아름다운지….


▲  꽃잔디


▲  달팽이

연구실에도 <꽃누리>님이 두고 간 대엽풍란이 꽃을 피웠는데, 그 향기가 복도까지 스며 나옵니다. 교정에는 철쭉꽃 피어나는 소리가 아우성입니다하다 꽃봉오리 터지는 아우성 소리에 창 밖으로 한눈을 팔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해마다 오월이 오면 살아있음이 부끄러워집니다. 온고을 팔달로에서, 빛고을 금남로에서,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북소리 둥둥 울리고, 꽹과리 소리 하늘로 솟는데, 깃발 높이 치켜들고, 주먹 불끈 쥔 성난 민중들의 함성이 오월이면 환청처럼 들리고 환영처럼 보입니다.

그 때, 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체육공화국이 되어 들떠 있던 바로 그 때, 명동 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농민복을 입은 청년, 조성만 열사는 배를 가르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투신하였습니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올림픽 공동 개최를, 그리고 양심수 석방을 외치면서 흰나비처럼 펄럭이며 날아와,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가슴을 부끄러움으로 멍들게 하였습니다.

90년 5월, 자고 일어나면 젊은이들이 죽어갈 때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면서 너무 울어서 눈이 통통 부어, 아내 보기가 민망하여 용변이 끝났는데도 신문을 붙잡고 앉아 있을 때, 신문 활자 사이에 떨어져 번진 눈물 방울, 그리고 젊은이들을 대신하지 못한 자괴감이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픕니다.

바로 그 때, 존경을 받아왔던 어떤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는 글을 썼는데, 그 후 그 이유를 따져 묻자, 시인은 "운동권 선배로서 손뼉을 치겠습니까, 침묵을 택하겠습니까. 생명을 살리면서 끝까지 운동을 연속시키라는 부탁이었습니다"고 진지하게 응수했답니다. `생명을 살리면서 끝까지 운동을 연속시키라는 부탁`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이라면, 말장난 같은 그 시적 표현을 빌어 `시의 굿판을 집어치워라`고 시인을 향해 외치고 싶을 뿐입니다.


▲  통일열사 조성만

아직도 열사들이 구천을 헤매며 부릅뜬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자주 민주 통일>은 우리 민족, 이 시대의 강령이라고 항변하면 구시대의 사람으로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육십을 바라보고 있어서 어차피 이미 한물간 노인네로 취급을 받아도 별반 서운할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음이 부끄러운 오월에는 정치권으로, 시민운동진영으로 살며시 투항(?)해버린 옛 동지들에게 아직까지도 그 강령은 유효하다고 주먹 불끈 쥐고 부르짖고 싶을 뿐입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들립니다. 팔달로에서, 금남로에서,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둥둥 북소리, 하늘을 찌르는 꽹과리 소리, 그리고 `자주 민주 통일`을 외치는 구호 소리가…. 지금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열사들의 시신을 묶었던 베옷으로 만든 깃발에 쓰여진 `자주 민주 통일`의 핏빛 선명한 글씨들이….
살아있음이 부끄러운 이 오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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