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절에서 마주친 풍경 셋

소중한 나의 과거

‘염화시중의 미소가 저렇게 생긴 것은 아닐까?’

피어난 수련의 꽃이 웃고 있다. 호탕하게 소리를 내면서 웃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은은하게 전해지는 웃음이다. 거기에는 억지도 없고 강요도 없다. 자연스럽게 공명되어지는 것 일뿐, 그 어떤 작위적인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옹달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웃고 있을 뿐이다.



전북 김제시 청하면에 위치한 작은 절이다. 하소 백련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축제가 벌어지는 기간의 첫 번째 휴일이어서 사람이 많다. 통상 절이라고 하면 깊은 산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조금 다르다. 지평선 축제로 이름을 얻고 있는 고장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높은 산은 아예 찾을 수가 없다. 산이 아닌 들녘 한 가운데 위치한 절이어서 조금은 이색적이다.

절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연꽃이 피어 있다. 아직은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피어 있는 하얀 꽃이 싱그럽다. 세진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아 좋다. 한 여름에 청량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내리쬐는 햇볕으로 인해 몸에서는 땀들이 배어나고 있었지만, 시각적으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수련들이 반겨준다. 예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관리하는 손길이 부족하였던 모양이다.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말라버린 곳도 눈에 띤다. 그래도 수련들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없는 상태에서도 고운 꽃을 피워내고 있다.

부처님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가섭의 웃음을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한다.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였어도 깊은 뜻을 헤아리고 있는 수련들의 모습에서 가섭을 떠올리게 한다. 마음과 마음이 일치를 이루었으면 되는 것이지, 더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관심과 정성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살아온 날을 돌아다보면 기쁜 일보다는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더욱 더 생생하다. 견뎌야 하는 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깊은 회한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에 들어 있는 정서에는 미움이나 원망은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만약 그 것이 살아 있다면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지속되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그럼 그것은 과거가 아니고 현재인 것이다.

시나브로 그런 부정적 마음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과거가 되어 있는 것이다. 반추하면서 내일을 위한 단서가 된다. 그것이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라도 나의 행동이고 나의 책임이다. 그것을 부정한다고 하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가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추한 모습일지라도 나의 초상이기에 더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수련 꽃을 보면서 철저한 자기 관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옛말에 ‘서툰 목수가 연장 탓만 한다’라는 말이 있다. 수련이 주인의 사랑만을 목매고 있었다면 저렇게 고운 꽃을 피워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아다보고 자기관리를 하였기 때문에 우뚝한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도구가 없을 수도 있고 부실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상황만을 탓하게 되면, 내 인생 공사는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튼튼하지 못하게 구축되어지는 것은 완전히 내 책임인 것이다.

주변 상황이 그렇게 되어져 있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 그렇다고 하여 현실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는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모두 다 나의 일이다. 잘한 일은 쉬 잊는다. 그러나 잘못한 일은 두고두고 거울이 된다. 잘한 일은 잘한 일대로 좋고 잘못한 일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에 우뚝한 수련 꽃을 보면서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과거를 부정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모두가 소중한 과거를 되새기면서 내일을 생각한다. 좀 더 환하고 밝은 날들을 기대한다. 꽃처럼 빛날 날들을 바라면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겠다. 뜨거운 햇살에 꽃이 환하게 웃고 있다. 

어머니의 정화수

“하- 고놈. 앙증맞게 생겼다.”

개구리다. 그런데 그 크기가 꼭 청개구리만 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청개구리는 아니다. 등의 모양이 아무르산 개구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작으니, 묘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수련의 잎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평화란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절에서 개구리를 보니, 두꺼비가 생각난다. 개구리와 두꺼비는 같은 양서류이다. 모양도 비슷하고 살아가는 행태도 그렇다. 그래서 아주 옛날부터 사람과는 아주 친근하게 지내왔다.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이 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이야기에서부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머니는 두꺼비를 아주 좋은 동물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부엌으로 엄금엉금 기어오는 두꺼비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일상으로 여겼다. 두꺼비는 복을 가져다주는 동물이라고 굳게 믿고 계셨다. 짐승에게 잘 해주면 언제인가는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셨다. 현세에서 못 받더라도 내세에서는 틀림없다고 생각하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하루 같이 사셨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세상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으셨다.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여기고 성실하게 사신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불만이 많았었다. 답답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이제는 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시면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우물에 가서 정화수를 뜨는 일이었다. 부엌의 조왕신에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으셨다. 몸이 불편하셔도 그 일은 하고 자리로 돌아오시는 모습이 그렇게 못마땅하였었다. 조왕신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엌을 관장하는 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어머니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어머니는 안주하려는 마음을 쫓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게을러지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그 누구도 그런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를 추스르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조왕신을 의지하여 삶의 긴장을 유지하려고 하신 것이다.

조왕신에 대한 존재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믿을 수 있다. 부엌을 관장하는 신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어느 날 만들어진 신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출현한 이래 살아가면서 지혜의 산물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였어도 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 능력 밖의 일은 결국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들이 잘 되기만을 기원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부모가 되어 자식들을 키워보니, 알게 되었다. 두꺼비를 존중하는 마음도 결국은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행여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자식이 잘 되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다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사랑과 지극정성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가 있었다. 그런데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스스로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 안주하려는 마음을 떨쳐낸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식 때문이었다.



앙증맞은 개구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다. 왜 살아계실 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지, 후회가 앞선다. 못난 자식을 위해서 평생을 하루 같이 살다 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에 푹 안기고 싶어진다. 어머니의 반에 반, 아니 천분의 일만 따라 한다면 바른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포장과 선물

“야! 곱다.”

색깔이 어찌나 선명한지, 가는 길을 멈추게 한다. 빨간색, 주황색, 그리고 노란색 등 아주 다양하다. 서로 경쟁하고 있는 듯 하다. 자기를 나타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론 가루받이 때문에 다양한 색깔이 만들어진 줄은 알지만, 그런 생각은 힘을 잃는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유혹에 빠지고 만다.



하소백련 축제의 주인공은 연꽃이다. 그러나 백일홍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당당하다. 축제를 기회로 삼아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주어진 생명에 대해서 한없이 고맙게 생각하면서 즐기고 있다.

생명은 스스로 원해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생명 이전의 일은 의지와는 상관없다. 이는 삶 자체가 선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물이란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생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태어난 것은 분명 선물이다.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필요 없는 것을 선물로 주었다고 불평하는 일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선물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선물을 받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속 알맹이가 무엇이든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게 되면,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

선물은 보통 마음을 잡기 위하여 준다. 그래서 선물에 포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받는 사람의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물의 목적이니, 예쁘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선물의 겉모습에 정성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선물이 뇌물로 왜곡될 수 있게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는 애매하다. 대가성이 있으면 뇌물이 된다. 그렇지만 대가성이란 것이 아주 애매하다. 그 한계선을 정하기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선물이 뇌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 액수가 크면 부담이 될 수 있다. 작은 것으로 진실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포장을 화려하게 하면 할수록 뇌물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우선 마음을 잡기 위하여 겉모습을 치장한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럼에도 포장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선물의 속성이 마음을 잡기 위한 것이니, 포장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크게 보면 인생 자체가 선물이다. 기쁨도 선물이고 아픔도 선물이다. 당장 고통을 받기는 하지만, 슬픔이 있기에 행복도 있을 수 있다. 고통 없는 즐거움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다. 가진 자는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산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고난을 겪어야 극복하였을 때의 성취감을 가질 수 있다.

작은 것에 감동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선물을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 큰 것만을 원하는 사람은 선물의 효용이 별로 없다. 아무리 큰 선물을 받아도 기뻐할 줄 모르며 더욱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밑 빠진 독에는 물을 채울 수 없다. 감동을 받을 수 없다면 처연한 일이다. 삶의 아기자기함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좋은 사람이 아무리 곁에 있어도 고마운 줄 모른다. 행복이 옆에 있어도 너그러운 마음이 없으면 발견할 수 없다. 아니 가질 수가 없다. 결국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삶이 풍요로워지고 깊어진다. 감동을 받으려면 여유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화려한 빛깔로 자신을 뽐내고 있는 백일홍 꽃을 바라보면서 선물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된다. 꽃으로 받은 선물을 통해 감동을 받게 되니, 마음이 흥겨워진다. 즐거워진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기쁨과 환희뿐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꽃이 있고 그 것에 취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 백일홍이 우뚝하다. <정기상님은 전북 대덕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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