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장마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그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던 더위를 쫓아내버렸다. 더위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 있어 충동하고 있었다. 방안에서 머무는 일이, 왠지 손해라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다. 어디라도 달려가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일요일 아침(07.9.2.)에 발동한 욕구는 주체하기 어렵다. 이런 낌새를 눈치 챈 집사람이 거든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소통하였으니, 문제는 장소였다.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여행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여러 장소가 겹쳐진다. 그러나 선뜻 마음이 가는 장소가 정하기 어렵다. 여름의 끝자락이기 때문이다.

“꽃무릇이 피었을까요?”
집사람의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가물가물하다. 이 때쯤 핀 것 같은데, 확실한 기억이 없다. 머뭇거리니, 핀잔을 준다. 꽃이 피었으면, 감상하면 되고 설사 피지 않았다 하더라도 즐기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내의 말을 듣게 되니, 옹졸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행이란 즐기면 되는 일이 아닌가.

여행이란 일상의 단조로움을 타파하는 기쁨을 얻는다.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즐거움인 것이다. 누적된 피로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재충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꽃이 핀 상황의 여부에 대해서는 구애받을 까닭이 없었다. 생각을 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전주에서 출발하였다. 하늘이 내려앉기는 하였지만, 기분은 상쾌하였다. 정읍에 접어들게 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이미 달리는 기쁨에 젖어 있으니, 비가 내리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을 줄어들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속을 달리는 기분이 더욱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흥덕(전북 고창)에서 선운사에 가는 새로운 길이 뚫려 있었다.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도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부안을 돌아서 가거나, 아니면 고창읍과 아산면으로 돌아서 가야만 하였었다. 그런데 거침새 없이 달릴 수 있게 된, 금방이었다. 시간도 많이 단축되었다. 숨 한번 쉬고 나니, 선운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선운사는 백제시대에 검단 선사에 의해 세워진 유서 깊은 절이다. 물론 전란과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고 중창되기를 거듭하였지만 대 가람으로서의 면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 24 교구 본사로서 호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가 반겨준다.

추사 선생의 글은 부도전에 있다. 부도전이란 고승 대덕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탑과 비석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추사 선생이 꿈에서 백파선사의 열반을 알고는 한 걸음에 달려왔지만, 이미 늦은 것을 알고 대성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열반을 추모하는 글을 직접 써서 비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부도전을 지나 대 가람 쪽으로 향하니, 시원한 물줄기가 맞이해준다. 도솔암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공명되는 듯 하였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거수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꽃은 9월 20 일 정도나 되어야 피어난다고 한다. 산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범종각을 들어서니,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 숲이 눈 안으로 들어오고 웅장한 가람들이 마음을 꽉 채워준다. 만세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3호), 대웅보전(보물 제 290호), 선운사 육 층 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29 호)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세월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산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고 편안해졌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준다는 말이 있다. 산사는 이곳에 존재함으로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었고 지금도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선운사는 깊이가 있다. 진흥왕이 수도를 하였다는 진흥굴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고, 장사송, 송악 동백 숲 등 천연기념물이 아름다운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보물 급 문화재(대웅전, 지장보살상, 마애석불 등)들이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선운사를 뒤로 하고 나오기가 섭섭하여 특산물은 장어와 복분자를 맛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식의 감칠맛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더덕구이의 그윽한 맛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집으로 출발을 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늘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즐거운 여행이었다.<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대덕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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