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야 ! 곱다.”
산의 풍광은 아직 곱게 물들여져 있지 않은데, 유독 빨갛게 물들여져 있어 돋보인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 있는 담장이 넝쿨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바위 위에 그린 그림이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원초적인 붉은 색이 가을을 선도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도 붉게 물들여질 정도다. 주변의 나무들은 아직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더욱 우뚝하다.

담장이 넝쿨은 도심의 한 가운데에서 자주 대하게 된다. 시멘트 문화의 삭막함을 보완해주고 있어 정감이 더 가기도 한다. 특히 오래된 대학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장이 넝쿨을 보게 되면, 역사와 전통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멘트의 건조함을 완화시켜주는 담장이 넝쿨을 산에서 보게 되니, 그 느낌이 색다르다.

적상산은 전라북도에서는 제일 먼저 가을이 찾아오는 곳이다. 가을이 무르익게 되면 산은 이름처럼 붉은 치마를 입은 것처럼 붉은 세상이 된다. 그러나 올해에는 이상 기후로 인해 가을이 더디 오고 있다. 예년 같으면 가을이 노래할 시점이다. 10월 중순이 되면 적상산은 온통 가을꽃이 활짝 피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 가을의 모습은 저 멀리 어귀에서 서성이고 있을 뿐이다.

가을이 보고 싶어 적상산을 찾았지만, 아직은 가을과 조우할 수가 없었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담장이 넝쿨이 위로해주고 있다. 붉게 물들어 있는 당장이 넝쿨이 없었다면 얼마나 허전하였을까? 도심을 정감 넘치게 만들어주는 담장이 넝쿨이 산 속에서도 기쁨이 되어주고 있으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붉은 담장이 넝쿨이 다른 나무들보다 더 빨리 붉게 물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아마도 열정이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내고 싶은 일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정성을 다한 만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여름 내내 너무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붉은 색으로 물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매서운 산바람의 도전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태양의 뜨거운 훼방도 당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이 넝쿨의 생명력은 이 모든 것을 모두 다 극복한 것이다. 어렵다고 피하지 않았고 당당하게 맞서서 이 모든 것들을 넘어 선 것이다. 그러니 당연 곱게 물들여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담장이 넝쿨이 붉게 물들여져 있다고 하여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 색깔이 마음을 잡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것보다는 그 색깔에 담겨져 있는 진한 생명력이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붉은 색깔 속에는 힘이 담겨져 있다. 그 색깔에는 진한 삶의 냄새를 베어져 있다. 그래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위라는 도화지에 예쁘게 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담장이 넝쿨이 마음을 잡는다. 붉은 색깔이 돋보이고 그 속에 담긴 진한 생명력이 시선을 붙잡는다. 우뚝한 담장이 넝쿨을 바라보면서 나를 본다. 질긴 생명력으로 바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당장이 넝쿨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꽃사과
 

“하 ! 고 놈. 앙증맞게 생겼다.”
분명히 사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과가 아니다. 사과처럼 생겼으니, 당연 먹음직스럽게 보여야 한다. 그런데 어찌나 그 크기가 작은지,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크기 때문에 귀엽게 보인다. 꽉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가 어렵다. 파란 하늘에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욱 마음을 잡는다.

꽃 사과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바라보는 이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오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진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즐거워지고 그런 모습의 피드백을 통해 내 삶 또한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은가.

태어나는 것은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한다고 하여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났음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가슴에 부정적인 생각이 그득 넘친다는 것은 불행이다. 그 것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서 있음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누구나 원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자신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다. 누구나 다 즐겁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원한다고 하여 모두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의 나락에서 헤매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그 것에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행복해야 하겠다는 욕심이 너무 커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욕심이 눈을 가리기 때문에 숲을 볼 수 없게 되고, 보지 못하게 되니 착각하는 것이다. 착각 속에서 사는 것은 꿈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살면 행복하고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욕심을 걷어내야 한다.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혜로 보게 되면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다. 바르게 보게 되면 정갈하게 살아가게 된다. 욕심이 앞서게 되면 사치하고 허황된 마음을 버리지 못하지만, 버리게 되면 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욕심이 앞서게 되면, 지루함과 단조로움에 갇혀버리게 된다. 그러나 지혜를 세상을 보게 되면 그 것은 사라진다. 무엇하나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서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에너지 습관이 몸에 배어서 순기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삶의 방식이 정갈해지고 소박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깨우침을 얻게 되고 행복의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꽃 사과가 가슴에 와 닿는 것처럼 마음에 사랑이 그득 넘치게 되는 것이다.

삶이 단순해지면 안은 비어진다. 비어진 공간에서는 고운 향이 배어난다. 향은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기쁨이 넘치게 되면 그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인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지혜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행복한 삶은 보장되는 것이다. 꽃 사과가 빛나는 것처럼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대덕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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