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세상> 청계천 그리고 목마와 숙녀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자본 개발의 상징 청계천에서 이 시를 떠올린 건 지나친 비약일까요. 비약일 수도 있겠네요. 수십년간 청계천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오다 자본을 앞세운 무지막지한 불도저의 철궤도 아래 쫓겨난 서민들을 생각하면요. 그들에게 가을은, 박인환이 읊은 것처럼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나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를 얘기할만큼 여유 있거나 낭만적인 계절은 절대 아닐테니까요. 철거 복원 과정 중에 3명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복원을 축하하는 자리에서도 또 한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철거 복원을 강행했던 주인공은 지금 자신의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타임지에서 주는 환경상도 받는다고 하는 군요. 지금대로라면 청계천에서 시작된 그의 꿈은 이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만 보입니다. 그가 한 단계 더 나아가 경부대운하를 공약으로 내건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청계천은 여전히 개발중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들이 끊임없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청계천 복원 주인공의 지지도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잔해만 남은 허름한 상가들엔 "철거 반대, 상인들 다 죽인다" 등 붉은 색 절규들만 남아 처절했던 삶의 주인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사연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청계천물은 흘러갑니다. 천변에 심어진 온갖 풀과 나무들은 한강에서 끌어올린 그 물을 양분으로 해 잎을 틔워내고 꽃을 피워내고 또 빠알갛게 퇴색된 모습으로 행인들의 시선을 붙듭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위에선 담쟁이 넝쿨이 핏빛 향연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행인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쫓겨난 수많은 철거민들과, 상인들과, 그리고 또 죽어간 이들의 울부짖음을 요. 그저 얼굴을 간질이는 억새풀잎과, 석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을의 황홀경에 흠뻑 취하며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지요.
서른 한 살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시인 박인환은 얘기합니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는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파란 가을 하늘에 싸늘한 바람 불어오면 낙엽에 술잔 뿌리며 기억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울리는 처량한 목마소리와 귓전에서 들리는 철렁거리는 방울소리를 요. 붉은 단풍물이 주루룩 다시 심장을 물들인다 해도….
청계천에 가을 해가 지고 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고 있는 괴물의 등 뒤로…교회의 자그마한 첨탑 십자가 사이로…가을 해가 붉게, 아주 붉게 지고 있습니다. 글/사진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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