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절인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식당 음식을 훔칠까"
"어떤 시절인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식당 음식을 훔칠까"
  • 승인 2008.03.2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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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 그리고 양지> 러시아 거리의 정직한(?) 도둑들

순대가게를 운영하는 윤씨는 도둑이 기승을 부린다고 투덜거린다. 비단 윤씨의 가게뿐이 아니다. 식당들로 붐비는 이 동대문 인근 `러시아 거리`에 너도나도 털렸다는 소리도 들려온다. 윤씨네의 경우 최근 6개월 간 3번의 도둑이 들었다. 강철문이 아닌 이상 도둑들에게 문 따는 작업은 일도 아니란다. 창문에 스카치 테이프를 붙이고 때려서 조심스레 유리조각을 뜯어내고 ㄱ자로 팔을 쑥 집어넣어 잠겨진 문을 연다고 한다. 앞문을 철통처럼 잠궜더니 한번은 뒷문을 뚫고 들어왔단다.



지폐는 퇴근길에 수거하니 현금피해는 크지는 않지만, 500원짜리 동전은 싹 쓸어간다. 그러고 보면 도둑이 현금을 노리고 침입하는 것도 아니다. 부엌도구부터 술, 쌀, 고기, 밑반찬, 하물며 식료품까지 거덜낸다는 것이다. 

세상이 변하면 도둑도 변했을 상 싶은데, 꽤 세련돼 가는 시대에 비추어보면 요즘 도둑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처사다. 돈이나 보석 따위가 없으면 `에라이, 허탕쳤어`하고 황급히 장소를 뜨는 것도 현대화된 도둑의 관성이었거늘 요즘 도둑은 허기진 빨치산 마냥, 하는 수 없이 주택가로 진입한 들개 마냥 애처롭기까지 하다.



쌀을 들고 가다가 몇웅큼 쏟아버린 흔적도 있다. 윤씨는 쥐를 유인하기 위해 도둑이 흘린 쌀을 한쪽에 모아두었다는데 윤씨에 따르면 `도둑맞은 쌀은 쥐도 안먹는다.` 음식도둑인 셈인데 음식의 양으로 봐선 도둑의 수가 2∼3명이라는 게 윤씨의 전언이다. 도둑도 짠밥을 먹고 자라는지 점점 과감해지는 것, 이 도둑들은 식당안에서 음주파티도 연다는 사실.

새벽에 들어와서는 지들끼리 요리하고 술마시며 놀다가 퇴근한다는 얘기다. 윤씨는 도둑에게 털리고도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거리며 도둑들의 행보를 마치 옆에서 본 사람처럼 일일이 열거한다. 앞서 앞문이 안 열려 뒷문으로 부수고 들어온 얘기로 돌아가서는, "얘들이 뒷문으로 들어와서는 궁금했나봐. 저번에 열렸던 앞문이 왜 안열렸는지…가게 안에서 앞문을 다시 열어보려 가격한 흔적이 있더군"하며 기가 막힌다고 말한다.  



윤씨는 "저것 봐" 하고 이것저것을 가리킨다.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뒷문인 철문 하난 해머로 부수려던 작정이었던지 박살이 나있었고 여러 정황상 당시 도둑들의 급박한 상황을 상상케 해주었다.    

경찰서에 신고해도 헛일이라고도 한다. 잡을 수가 없다는 소리다.
"한번은 의뢰했더니 경찰서에서 지문체취에 필요한 분을 들고 와서 손님들 밥 먹고 있는데 뿌리려하더군. 장사 망칠 일 있어? 그래서 `관둡시다. 없던 일로 합시다` 하고 보냈어."

윤씨는 과거 고깃집을 운영하다가 상호도 바꾸고 순대가게로 전향했다. 원래 순대가 전공이라고 한다. 일명 `원조순대`. 순대가게로 바뀐지 1개월 정도. 힘들었던 고깃집보다 수입도 높고, 단골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좋은 출발선에서, 도둑들로 인해 부서진 뒷문과 가게 앞유리를 교체할 때 그 묘한 상실감이란… 엄습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란….    

그는 씁쓸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둑의 심정도 이해하는 것 같다.
"허나 사는 게 다들 힘드니 그런 것 아니겠어. 시절이 어떤 시절인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식당의 음식을 훔칠까나. 이 가게 턴 도둑들, 큰 건물이나 현대식건물에 침투해서 무얼 얻을 길은 없을 거야. 잡힐 위험도 높고…. 더군다나 당장의 배고픔 때문이니 지들처럼 힘없고 빽없는 도시 영세민들이 운영하는 구식 건물들을 노리는 거겠지. 어디 신고가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   



도대체 도둑들의 정체는 뭘까. 도둑질이 범죄인 건 분명하나 그 도둑들, 흉악범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순대가게 건너 고깃집을 운영하는 김 사장에게도 사연이 있다. 이 대목에서는 도둑들의 정체도 어렴풋이 연상할 수 있다.

"한번은 영업을 끝내고 할 일이 남아 새벽까지 부엌서 칼질을 하고 있었어요. 잠깐 화장실을 가려고 부엌문을 열었는데 몽골계로 보이는 청년 셋이 제 앞에서 화들짝 놀라더니 줄행랑을 치더라고요. 오히려 저보다 그 사람들이 더 놀라는 기색이었죠. 얘들이 제가 있는 줄 모르고 몰래 들어왔다가 부엌문이 열리면서 뿜어내는 환한 불빛에 얼마나 당황스러웠으면…."

김 사장은 50대 여성이다. 나이든 여성을 본 젊은 사내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에서 그들, 도둑치곤 꽤나 순박해 보인다.   

인근 파출소를 찾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동네 여기저기서 도둑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최근에 부쩍 도둑이 늘었다고 해요. 동대문 일대 말고 저쪽 성북동도 그렇다고 하던데. 특히 주택가. 일반 가정집 아무도 없는 낮 시간을 이용해서 싹쓸이 해간답디다. 동대문 러시아 골목의 경우, 러시아 사람뿐만 아니라 중국계부터 동남아까지 다양해요. 저번에 한번은 도둑 든 집 지문 채취하러 갔었는데, 등록이 안된 지문이더라고요. 뭐겠어요. 불법체류자겠죠."

파출소측도 야간순찰조가 활개를 칠지언정 그들의 활개에는 당해낼 재간이 못 되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영세상인들의 어두운 뒷골목까지 감당할 처지가 못되는 정책문제가 드러내는 한계이기도 하다. 어쩌면 잘 먹고 잘 입는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치안.



한편으로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이들의 삶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돈 벌러 와서 악덕기업주로부터의 수난에 못 이겨 공장의 담을 넘지만 담장 밖에는 또 출입국관리법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그들이 굶어죽지 않고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때깔` 나는 건물을 터는 것도, 뭉칫돈이 든 지갑을 강탈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 양지바른 곳에서 `뻘짓거리`하다가 걸렸을 시에는 그들의 사정도 모르고 적대시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떤 유린을 당할 지도 모르는 거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 짐작이 간다.



그러니 그저 경비가 허술한 영세시민들의 부엌을 터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마음놓고 행할 짓은 못된다. 어쨌거나 잡히면 끝장이니깐.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도둑` 일지도 모른다. 

양지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렇듯 음지는 음지를 자꾸 생산해낸다. 예나 지금이나 양극화는 균열의 미세한 조짐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음양의 조화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는 우리들이지만….  공민재 기자 selfconso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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