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 그리고 양지> 같은 그리고 다른…

미장원과 공사판. 참 안어울리는 두 단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으로 둘의 방향성은 동일하다. 두 현장 모두 완성을 지향한다. 전자는 사람의 머리를 곱게 가꾸고 후자는 벽돌을 쌓아올려 또 하나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번 취재 현장은 그 공사판이 재건축 현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장원과 공사판, 이들이 서로의 완성품을 위해 이들 내에서 각각 작동하는 방식은 거의 일치한다.

미장원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조잡해진 이미 존재하는 사람의 머리를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재건축 현장도 이미 존재하는 건물을 다시 깎고 덧칠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 현장의 이 둘은 말그대로 `참 안어울리게` 위치돼 있었다.



관념적으로는 이 둘이 `동일 방향성`이라는 근본에 매달리게 돼 어울리게끔 판단되지만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면(특히나 이번은 두 현장이 달라붙어 있었다) 차별화 된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청각과 시각이 순간적으로 인간의 관념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장성이란 그렇다. 미장원은 깔끔하고 공사판은 난잡하다.

눈과 귀로 현장을 느끼면 미장원은 아름답다. 더군다나 이 미장원은 동네 미장원치고는 신식으로 무장한 곳이기에 인테리어 면에서는 압도적이다. 곱고 예쁜 손을 지닌 헤어디자이너가 예리한 은빛 가위를 이용, 부드럽고 빠른 손놀림으로 `싹둑 싹둑` 머리를 재건축하는 모습. 이는 현대 이발문화의 하나의 아이콘으로 등극될 수도 있을 법한 `고급스러움`을 자아낸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지만 그 자체도 인테리어나 헤어디자이너들이 풍기는 이미지와 부합된 이곳 특유의 고급스러운 아우라 속에서 이미 버릴 수 없는 `추미(추악한 미)`로 등극한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은 많았다. 헤어디자이너들은 손님 때문에 다들 바쁘다는 이유, 일하는데 방해된다는 이유, 그리고 기자를 불편해하는 이유로 "나가주세요"라고 정중하게 그리고 다소 힘이 실린 투로 대화를 거부했다.

"어머 저리 치우세요. 손님들이 불편해하잖아요. 누가 사진 찍으면 좋아하겠어요."
하긴 그렇다. 특정 시선은 폭력이다. 특정 목표를 시선에 내재한 사진도 찍히는 당사자에겐 심리적으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손님들은 로보트처럼 얼굴을 고정한 채 기자에게 곁눈질만 한다. `이 무슨 당치 않은 상황이냐`라는 듯. 카메라를 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간이 찌푸려진다.

바로 옆에서 흙먼지 날리는 공사중인데 문은 왜 열어놓았는지 물어봤다.

"날씨가 참, 에어콘 틀기도 뭐하고 문닫아 놓기도 뭐하고 그러네요. 공사야 금방 마치겠죠. 원래 공사판이 오후 6시 `땡` 이잖아요. 저희는 6시부터 제대로 바쁘거든요. 학생 직장인들 퇴근하고 막 들이닥치니까요. 근데 저 공사판 사람들은 쉴새없이 먼지 날리네. 쉬질 않아요 도대체가."



미장원과는 상이한 시각과 청각의 현장성에 놓여있는 공사판.  
"바빠 죽겠구만 무슨 얘기요?"
마감시간내 끝내야 하는 일들이 많은지 한참 삽질들이다. 일꾼들간 대화도 없어 타이밍을 잘못 잡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침 6시에 나와서 일당 챙겨먹는 사람일 뿐이에요. 어디 소속도 아니라 `쓰메끼리 임금` 같은 건 우리에게 적용 안돼요. 작은 공사라 금방 끝날 것도 같고. 매일매일 일당 챙기면서 여기 소장이랑 암묵적으로 합의한 거죠. 그래서 다행히 첫날 소개소에서 일당 10% 떼인 거 이후로는 전액 그대로 받게 됐네요. 이제 3일째에요. 보시면 알겠지만 다들 젊습니다. 저도 삼십대죠. 다들 일 자리 없어서 잠깐 용돈벌이 나온 겁니다."



대학 졸업후 아르바이트식으로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왔다는 전언이다. 정식으로 취직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방황하는 30대랄까. 최근들어 방황이라는 단어는 30대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정권도 바뀌었는데 괜찮은 일자리 창출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깔깔 웃는다.



"지금 무슨 소리하세요. 저희가 바본 줄 압니까. 다 알만큼 아는 젊은이들인데. 투표랑 관계없이 나아질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정치적 자살` 이라는 말은 이제 놀랄 말도 아니겠죠. 젊은 사람들이 왜 정치적 자살을 하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우리도 우리가 왜 그러는지 모르게 그렇게 자생했어요. 과거와 달리 연대가 없어요. 이 현실을 타파할 연대요.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어딘가 소속돼 시민운동할 여력도 없고요. 시민운동도 월급제 아닌가요? 이젠 그런 곳 `취직`하기도 힘들다던데. 그것도 빽이 있어야지."

재건축 취지로 의해 곁의 미장원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울릴만한 완성품이 나올 건지 궁금했다. 그들은 무슨 상관이냐는 투다.

"오늘 기자분이 언급해서 옆에 있는 미장원의 존재를 재인식하네요. 우리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주변 건물 미간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있겠나요. 그럴 여유 없죠. 그냥 `옆에 뭐가 있는가 보구나` 하는 거죠. 저기서 머리 깎지 않는 한 저쪽 신경 쓸 틈 없죠. 하물며 담배 한대 피며 잠시 쉬더라도 주위를 살펴볼 기력이 없네요."



한지붕 아래 공사(?)에 여념이 없는 이 어울리지 않은 두가족. 삼일 동안 서로 인사한 적도, 미장원측은 건물 굉음 때문에 호소한 적도, 재건축하는 이들은 무더운 봄날 물 한 잔 먹자고 미장원을 향해 친근감 표한 적도 없다고 한다.

같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차이를 자아내는 이들. 앞으로 미장원은 자본논리에 의해 당연히 장사에 박차를 가해야 함이다. 취업하지 못한 방황하는 30대들 역시,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 접고 새로운 정부 탄생과 더불어 그동안 말라 비틀어진 껍질을 깨고 비상하길 그들의 부모형제 그리고 대한민국의 부모형제들이 기원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본다.

이미 사회는 개인화 됐다. 좋게 말해 개성화 됐다. 더불어 살거나 섞이지 못하더라도 각자 잘살아보는 것, 더도 덜도 아닌 내 밥그릇이나 챙기는 것, 안타깝지만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이들의 방식이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통합 따윈 차치하고 존중해야할 방식이다. 미장원과 공사판, 참 안어울리는 단어들이다. 공민재 기자 selfconsole@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