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폐지 인터뷰>송두율 교수 -재독사회학자-

국가보안법(국보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4개월 여 만인 1948년 12월 1일 공포됐다. 그리고 그 서슬퍼런 칼날을 휘두른지 벌써 60년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국보법은 여전히 극명한 현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949년의 국회프락치 사건, 1958년의 진보당 사건, 1973년의 최종길 교수 사건, 1975년의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 등 국보법이 만들어 낸 정치적 조작사건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최근 들어 국보법 위반사범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2004년의 송두율 사건, 전교조 통일위원회 김맹규·최화섭 사건, 사진작가 이시우 사건들을 보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서면서 국보법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해 9월 제14기 한총련 의장을 지낸 장송회씨가 국보법 위반과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지난 1월엔 한총련 의장 유선민씨가 구속됐다. 유씨에겐 징역 2년6월에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됐다. 전북 지역에서 `통일 교사`로 불렸던 김형근 교사가 구속됐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선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현아 위원장도 연행됐다. 2월 27일엔 10여년간 수배중이던 윤기진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이 잡혀들어갔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안당국들이 실적 올리기와 눈치 보기에 급급, 무분별한 연행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보법 제2조의 `반국가단체`라는 표현은 북한을 주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2007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선언서는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국보법은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 그리고 통일로 나아가는 현 시점에서 버려야 할 낡은 유물인 것이다. 
<위클리서울>은 `국보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문제를 놓고 지난해부터 시리즈로 각계 전문가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이시우 작가, 동국대 강정구 교수, 박래군 인권운동가, 중앙대 임헌영 교수(민족문제연구소장), 한국외국어대 이장희 교수, 국민대 이광택 교수(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 상지대 홍성태 교수(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진중권 중앙대 교수,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김승교 변호사, 한국진보연대 대표 한상렬 목사,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 원로 재야 인사 이기형 시인, 김규동 시인, 소설가 남정현 선생, 한국진보연대 오종렬(71) 공동대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전 전국민주화교수협의회 의장), 간디학교 최보경 교사, 한겨레신문 홍세화 기획위원 등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이번호엔 지난달 17일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와 관련, 무죄판결을 받은 재독사회학자 송두율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송두율 교수는 청년시절 독일로 유학간 뒤 친북인사로 입국을 거부당하다 37년 만인 2003년 9월22일 귀국,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가입, 잠입·탈출, 회합·통신 혐의와 사기미수 혐의로 구속기소된 바 있다. 송 교수는 이듬해 8월 독일로 건너가 학문활동을 이어나갔고 최근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올지는 미지수다. 독일로 돌아간 이후 발간한 그의 저서에서 37년 만에 찾았던 고향을 유행가 가사를 빌어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네"라고 표현한 점만 보더라도 송 교수가 어떤 심정으로 독일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만하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는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67년 독일에 건너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하버마스 교수의 총애를 받으며 27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 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뮌스터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는 1974년 재독 반유신단체인 `민주사회 건설협의회` 초대의장을 맡으며 `반정부 인사`로, 1991년 이후 북한을 10여차례 방문하면서 `친북 교수`로 인식돼 줄곧 입국을 거부당해 왔다.
지난 2000년에는 문익환 목사기념사업회의 `늦봄통일상`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을 시도했으나 준법서약서 문제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송 교수는 이 문제와 관련 "양심의 자유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정신적이거나 물리적인 외부의 강압에 의해 어떤 행위를 강제적으로 유도할 수 없다`는 데 있다"며, 따라서 "실정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테러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이미 법을 어겼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준법서약서를 쓰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럼에도 송 교수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나름의 길을 제시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고 열심히 활동해 왔다.
송 교수의 학문적 관심은 서구의 지성사를 조망하는 것은 물론 한반도의 민족적 현실, 즉 조국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이라는 주제에 맞추어져 있다. <한겨레>신문에 여러차례 칼럼을 쓰기도 했으며 우리말 저서로는 <계몽과 해방> <현대와 사상>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역사는 끝났는가>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경계인의 사색> 등이 있다.
이런 저서들 속에서 송 교수는 30여년이 훌쩍 넘도록 분단된 조국의 남쪽 땅을 밟을 수 없는 개인사 속에서 민족통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는 물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멀리서 바라보고 떠올린 여러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여전히 독일에 머물고 있는 송 교수.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는 송 교수다.
송 교수는 인터뷰를 통해 국보법이 북한을 바라보는 자신의 이론적 방법론중 하나인 `내재적-비판적 접근`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송 교수의 `내재적-비판적 접근`의 골자는 북한 내부의 문제는 북한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북쪽 사회가 어떤 사회이고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지 그들 자신의 언어로 이해하고 나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 걸린 문제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송 교수는 이 문제로 공안당국과 보수논객들에게 곤욕을 치렀다.
이에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김세균 교수는 공안당국과 보수논객의 관점을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그 문제에 대한 공안당국과 보수논객들의 관점은 이런 거예요. 독일에서 어떤 내재적 비판론자가 간첩이더라, 그러니 너도 간첩 아니냐는 식인데, 그건 말이 안 되죠. 내재적 접근은 연구의 보편적 방법, 출발점입니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나 헤겔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문제를 밝혀내는 것이거든요. 송 교수도 그렇게 해요. 그리고 송 교수는 그를 통해 두 체제간의 화해와 협력을 얘기하려 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송 교수를 남북한 체제의 현재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민주공동체로서의 통일 조국을 꿈꾸는 미래의 철학자라고 일컫기도 한다. 다음은 통일 조국을 꿈꾸는 미래의 철학자, 송두율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독일도 한때 분단 국가였다. 당시엔 국가보안법과 비슷한 법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작동했나.
▲ `어떻게 작동했나` 가 아니라 `사실인가`로 물어야 한다. 모든 나라는 `국가전복`을 기도하거나 자국의 국가기밀을 탐지하는 첩보행위를 형사법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한국처럼 `국가보안법`과 같은 별도입법을 통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은 없다.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일각에서 흡사 그러한 법이 서독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동독체제를 `고무, 찬양, 선동`했다거나 동독인과 `회합, 통신`했다고 해서 처벌하는 법은 절대 없었다.
 동독체제를 한 예로 서독에는 동독의 집권당 `사회주의 통일당 SED`과 밀접했던 심지어는 재정적으로도 도움을 받았던 `독일공산당 DKP`가 있었지만 당원이라고 해서 형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물론 당원은 서독의 관리가 되거나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제재를 받았지만 우리사회에서처럼 공공연히 생사여탈권을 쥔 특별법인 국가보안법은 없었다. 제 동료 가운데도 공산당 당원이었기에 교수임용을 주정부가 거부, 결국 학계를 떠난 경우는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결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 국가보안법과 관련 대법원 판결에서 `독일 국적`이라는 부분이 작용했던 걸로 안다.
▲ 외국 국적자가 방북했을 때도 이를 `잠입, 탈출죄`를 적용, 처벌하는 국보법이 얼마나 상식에 어긋나는 짓인지는 삼척동자도 이제는 알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일 언론들은 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곧 "한국은 국보법을 이제 독일까지 수출하려 드느냐"라고 비아냥거렸다. 이번 대법원 판결 소식을 듣고 주불가리아 대사인 미하엘 가이어 박사(당시 주한독일 대사)는 "한국의 시계바늘이 참 늦게도 돌아간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빨리, 빨리`가 대명사인 한국사회에 정말 걸맞지 않는 것들 중의 하나가 국보법이기 때문이다.

- 송 교수도 아시다시피 `간첩`과 `빨갱이`라는 말은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 `빨갱이`와 `간첩`은 우선 의미론적 차이가 있다. 빨갱이는 말 그대로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빨갱이만 간첩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 바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도 간첩이 될 수 있다.
아니 이러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국가기밀을 다른 나라(예를 들면 미국이나 일본)에 넘기면서도 자신은 간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주장한다. 또 그러한 행위는 결코 `간첩행위`가 될 수 없다는 일반적 통념도 강하다. `우방`이자 `혈맹`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개념혼란은 미국은 남한을 지켜주는 `우방`이고, 북한은 남한의 `적국`이라는 단순한 등식에 기초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반공`이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회화`의 중추기능을 했기에 가능했다.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는 배경에는 반공,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반북`이 내면화되었기에 가능하다.
물론 과거보다 이러한 경향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가령 선거때처럼 내면화된 이러한 집단의식은 견고하게 남아있다. 특히 사회적 가치체계가 돈과 물질 중심으로 굳어지면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의견에 대한 자기정당과 자기방어수단으로 간첩이나 빨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노무현정권의 이른바 `4대개혁입법`이 어떻게 좌초되었는지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 국보법에서 얘기하는 `북 고무, 찬양`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가. 최근 일부에서 제기된 `종북`이라는 말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 국보법의 `고무, 찬양`은 가령 학문적 판단이나 주장도 처벌할 수 있다. 즉 사상과 양심에 근거한 주장도 `친북`이라는 정치적 행위로 처벌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친북`과 구별된 `종북`이라는 개념도 등장하는데, 이 개념을 보수우파만 아니라 이른바 좌파도 사용하고 있다. `친북`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을 인정하는데 반해 `종북`은 아예 이조차 인정하지 않고 순전히 수동적으로 따라하는 맹신적 행위라고 여긴다.
국보법은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의미론적인 차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둘 다 `고무, 찬양`에 속하고 처벌될 수 있다. 따라서 `친북`이나 `종북`을 두고 설전하기 이전에 국보법이 아직도 살아있는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철폐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나는 `친북`도, 더구나 `종북`이 아니기에 국보법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사실 국보법을 지금까지도 온존시켜왔지 않았는가.

- 친북과 종북 논란의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친북 또는 종북이라는 논란의 배경에는 사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있다. 즉 국보법은 이제 `친북` 정도는 너그럽게 봐주고 있고 순전히 북의 간첩이나 철저한 `종북주의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법이라는 것이다. 간첩이나 종북주의자에 대한 생각은 이렇듯 사회민주화와 경제분야에서 북에 대해 절대 우위를 차지한 남한이지만 국보법 철폐는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이번 대법원판결에서 보충의견을 낸 박시환 대법관이 주장한 것처럼, 우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수호하는 헌법정신을 이보다 하위인 국보법이 자주 유린하는데 있다. 가령 북한에 대한 저의 `내재적-비판적 접근방법`을 고무, 찬양의 구체적 정황으로 끈질기게 몰고 간 검찰의 논고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판결은 현재 국보법이 폐지되거나 개정되지 못한 조건에서나마 국보법의 악용과 폐해를 다시 한 번 사회적으로 상기시킨 사건이었다. 입법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데, 이번 18대 국회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국제적으로 항상 지탄받고 있는 이 법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한 불가사의한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이번 대법원 판시는 보여 주었었다. 모두들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 지겨운 물음일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얘기해달라. 한국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각에서는 언론의 심각성을 얘기하더라.
▲ 한마디로 말해서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의 핵심에는 이른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의 구조화된 폭력이 놓여 있다. 권력과 자본의 논리를 요설로써 정당화하기에만 급급한 언론은 이번의 대법원판결이후에도 역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해방이후 최대간첩`으로 여론재판을 이미 끝낸 언론은 이번에도 역시 한마디의 반성의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이런 수준의 언론은 민주화와 통일은 물론, 복잡다단한 세계화의 시대에 국민을 계속 헤매게 만들 수밖에 없다.
2004년 7월, 서울고법재판에서 제가 집행유예로 풀려날 때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라는 제하의 사설을 내보내며 재판부를 격렬히 비난했던 <조선일보>는 이번에는 대법원을 비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송두율 교수` 대신에 `송두율 씨`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분풀이를 하려고 하는지, 하여간 한심한 작태다. 또 이러한 언론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자칭 `지식인`들의 문제도 너무 크다. 이러한 사실을 저의 저서 <미완의 귀향과 그 이후> 속에 기록으로서 보관해 두었다.

- 남북통일은 국보법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 국보법이 있는 조건에서 사실 자가당착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떤 행위를 국보법에 의해서 처벌할 수도 있고, 같은 행위를 `남북교류촉진법`에 의해서 권장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같은 행위를 이처럼 달리 해석하는 법이 있는 조건에서 행위자는 항상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북이 `평화통일의 동반자`라고 하면서도 이를 동시에 `주적`이라고 보는 모순의 구체적인 표현인 국보법을 미래지향적으로 폐지하지 못할 때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사고와 정치행위도 적극적으로 될 수 없다. 바로 이점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야 할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솔직히 말해서 "젊은 세대에 기대를 건다"고 선뜻 말하기 힘들다. 한국적 현실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젊은 세대의 `정신적 노령화`의 정도는 최근 심각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은 우선적으로 기성세대에게 있다.
50대가 된 20대의 정치행위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상당히 놀랐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진실을 위한 저항이라는 젊음의 특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할 때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 <젊음과 지성은 반항할 권리가 있다>는 프랑스 사회주의 작가였던 앙리 발뷔쓰 (Henri Balbusse, 1873-1935)의 외침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제 법적으로는 `경계대상인 경계인`이 아닌 자유인이다. 기분이 어떤가.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대법원 확정판결을 접하고 가졌던 느낌은 `사필귀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21세기 문턱을 넘어 선 지도 한참이나 된 이 시간에도 국가보안법을 두고 대법원이 나서서 유권적 법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다. 합리적인 사회에서 작동하는 법 체계와 운용은 세계의 변화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국보법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랑 무관하게 보인다. 그래도 남아 있는 모순을 이번 재판부가 지적한 것은 오랜만에 들리는 기쁜 소식이다.
이번 판결이 정말 구시대적 발상에 기초한 `국가보안법 폐지`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까지도 해본다. 포승이나 수갑을 채우고 수사하는 비인간적인 관행이 사라지고 검찰심문시 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도  37년만에 귀향해서 내가 직접 겪은 수모와 고통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이에 이은 희망적인 소식이라고 생각된다.
`역사는 진전한다`는 위안을 우리에게 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실망 중에도 역사의 흐름에 동참해야하는 당위를 느끼게 하는 것 같다. 프랑스혁명중에도 한때 `텔미도르 반동`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의 이상과 실천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돈이면 최고지 도덕은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는 식의 `잘못된 계몽` 속에 묻히고만 이번 대선과 총선을 지켜보면서 사실 우리말 집필을 접어두고 지금은 정년퇴임을 앞 둔 독일어저서에만 집중하고 있다만…. 좌우간 `더 많은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계속 희생을 요구할 것 같다. 그동안 우리 부부와 가족을 위로해 준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사진/ 후마티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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