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망해사에서

망해사에서

코끝을 자극하는 진한 향에 저절로 시선이 간다. 하얀 꽃잎에 노란 암술이 반짝이고 있는 찔레꽃이다. 가지에 가시를 지니고 있지만 하얀 꽃이 우뚝하다. 연초록 바람이 머물다 떠난 자리라서 그런지, 그 향이 참으로 좋다.



찔레꽃 향이 우주에 그득 차고 있는 이곳은 망해사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절이라는 뜻이다. 만경강과 서해가 교차하는 곳이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바닷물 위로 갈매기들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걸림 없이 날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무리 지어 비행하고 있는 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무엇을 잊지 못하여 저리도 고운 향을 피워내고 있는 것일까?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기 위한 몸부림인가? 아니면 보고 싶은 님의 얼굴이 간절하게 그리워서 내는 향일까? 세포 구석구석까지 배어들고 있는 향을 온 몸으로 음미하면서 눈을 감는다. 맑은 향은 육신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인생무상이라고 하였던가? 수 천 년 아니 수 억 년을 오늘의 모습인 채로 지켜온 이곳이 달라진다고 한다. 바닷물을 따라 수많은 배들이 들어왔고 만경강 강물은 쉴 사이 없이 서해 바다로 들어갔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망해사는 이제 바다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한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망해사가 된다고 한다.



새만금방조제로 인해 이곳이 바다가 아닌 육지로 바뀐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방조제로 인해 달라진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다시 바다가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그런 사실을 수용하기가 왜 어려운 것일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중생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아니면 무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욕심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일까?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든 까닭일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속에서 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진한 찔레꽃 향에 취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심호흡을 통해서 향을 가슴 깊은 곳까지 들이마시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온 몸이 밝은 향에 잠기게 되니,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것 같다.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의 상태가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향은 순결한 냄새가 분명하였다.

향은 씨앗이란 생각이 든다. 육신은 오관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지만 영혼을 인식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영혼은 오관으로 감지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씨앗처럼 말이다. 씨앗은 알고 있다.



씨앗은 자기 속에 생명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씨앗이 소중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소중하고 중요하다. 온 몸에 배어들고 있는 꽃 향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 것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은가?

방조제로 인해 바다가 보이지 않는 망해사라 해서 바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이유가 사라져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망해사에 서 있으면 바다가 보이든, 보이지 않던 바다는 존재하는 것이다.



처음 그 자리의 소중함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찔레꽃 향에서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방조제로 달라질 망해사를 바라보면서 깨닫게 된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넉넉해진 마음으로 욕심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갈매기들이 부럽다.

괜찮은 사람

"당뇨성 망막증입니다."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1개월에 한번 씩 검사하면서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치료를 하여도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의사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들녘에 섰다. 만감이 교차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원망하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 사람이 얼마나 약하고 어이없는 존재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찾아온 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털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논에서 새 한 마리가 비상하고 있다. 하얀 깃털을 바람에 날리면서 파란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유연할 수가 없다. 우아한 새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부러워진다. 모두 다 털어버리고 저렇게 자유롭게 날아오르고 싶었다.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다.

병을 이기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였던가? 억울하다는 생각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아니라고 분통을 터뜨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고집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더욱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분명 어리석음 때문이다.

광고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바쁘면 쉬었다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치료해보아서 되지 않으면 죽으면 될 것이다.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고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싶지만, 미련이 남아 있는 중생이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욕심으로 또 다른 욕심의 불길을 태우고 있지 않은가?

나라는 존재는 떠올려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게 되니, 쓸 데 없는 생각들이 춤을 추고 있다. 죽어버리면 나를 떠올려준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실소하게 된다. 알아주면 무엇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또 어떠하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다. 넉넉한 마음으로 나눌 줄 알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가?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미래의 병에 대해서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오늘이 씨앗이 되어 내일이 되는 것이지만.

오늘의 병은 어제의 씨앗이 잘못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의 결과는 오늘을 잘 관리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의사의 처방대로 잘 따르고 오늘을 잘 관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두렵고 불안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파란 하늘을 마음껏 날고 있는 새를 바라보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오늘을 성실하게 채움으로서 만족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어도 어찌할 수 없으면 그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새들의 자유는 바로 그런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살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완주 봉동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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