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붓꽃과 장승

노화와 희망 

언제 그렇게 피어났을까? 꽃이 활짝 피어 있으니, 온 세상이 노란 색으로 물들어버린 것만 같다. 호숫가에 피어난 노란 붓꽃은 물빛마저 노랗게 바꾸어놓고 있다. 정녕 여름이 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걷는데, 온 몸에 배어드는 열기를 주체하기 어렵다. 꽃이 없다면 가는 길이 더욱 더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절벽에서 부르는 노래가 희망이라고 하였던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생각과는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음에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마음은 아직도 열정이 넘쳐난다. 의욕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것만 같다. 그러나 정작 행동으로 옮기려하면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곤 한다.

전북 진안군에 위치하고 있는 마이산. 입구에서 탑사에 이르는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고 힘들이지 않고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금당사를 지나 오수에 이르게 되니, 다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이 정도의 거리조차도 제대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다.

운동 부족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간신히 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다. 바로 붓꽃이다. 노란 색깔이 어찌나 선명한지 마음을 가져가버린다. 꽃이 힘들다는 생각도 함께 가져가 버렸을까? 다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꽃의 화사함에 취한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 아닐까? 세월 따라 신체의 노후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눈이 침침해지고 이가 흔들리는 것을 탓하면서 걱정만 하고 있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은가? 물론 운동량을 늘리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노화를 막을 수는 없다.

누구는 그랬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그리고 그 행복은 젊은 날의 대가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고 싶을 때 자지 않고 일하고,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였으니, 이제는 놀 권리가 있다고 하였던가?

휴식은 중요하다. 열정이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휴식은 꼭 필요하다. 몸을 너무 혹사하게 되면 그 결과는 분명 나타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혹사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삶의 보람도, 행복도 결국은 휴식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휴식은 그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치 있는 것이다.



송순이 눈부시다. 햇살에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빛나고 있는 송순은 묵은 소나무 이파리가 있기에 더욱 더 돋보인다. 이파리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송순이라면 볼품 없을 것이 분명하다. 신구의 조화다.

바닷가의 돌멩이는 모난 것이 하나도 없다. 돌멩이가 그렇게 매끈매끈해질 수 있는 것은 지치지 않는 사랑 때문이다. 쉴 사이 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정성으로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사랑했기 때문에 그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사랑을 하여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가는 길이 험하고 가시밭길이라고 하여 중도에서 체념해버린다면 결국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매끈매끈한 돌멩이가 되기 위해서는 한 해 두 해의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사랑은 결코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신체가 노쇠해진다고 하여 미리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정성으로 관리하고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이다.

나이를 먹어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걷는 데에도 힘이 들지만, 꽃을 보고 힘을 낼 수 있지 않은가? 관점을 달리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방안을 찾을 수 있다. 집착하고 고집만을 피우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노랗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면서 슬기롭게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웃는 장승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이 그렇게 보기에 좋을 수가 없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저리도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일까? 입 꼬리가 눈가에까지 올라가 있고 하얀 이가 모두 다 드러나 있다. 세상의 근심 걱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밝고 맑은 영혼의 모습은 바로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보통 장승들은 키가 크다. 목장승이나 석장승 모두 다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무서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 웃고 있는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는 것은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이다. 그래서 험상궂은 표정으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장승은 대부분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하대장군이 있으면 지하여장군이 있다. 음양의 이치에 맞게 남자의 형상과 여자의 형상을 조각하여 세워놓는 것이다. 장승을 깎는 장인의 마음이 지극하기에 힘을 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성이 담겨 있어서 영험한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 것은 다르다. 할아버지의 형상과 할머니의 형상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쌍으로 서 있는 것은 여느 장승이나 똑같다. 그러나 크기가 다르다. 시선이 위로 향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얼마나 정겨운 일인가? 위로 올려다보게 되면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 그러나 내려다보게 되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내려다보이는 시선에 감사하는 마음이 곁들여진다. 세상에 고맙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마음에는 긍정적인 자세로 이어진다. 타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낮은 곳으로 임하게 된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게 한다. 이런 태도를 우리는 바른 매너라고 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세상을 바르게 본다는 것은 가식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고 착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되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사는 것은 활기로 넘쳐나게 된다. 살아가는 나날이 신날 수밖에 없다. 일신우일신이라고 하였던가? 순간순간이 새롭기만 하면 그것은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닌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웃음. 장승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채워가면 겸손해질 수 있고 겸손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이런 작은 관심들이 행복을 창출해낼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장승의 웃음 띤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웃음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라고 하였던가?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은 삶이 아닌가? 동물로 태어났다면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고 말 것이 아닌가? 환하게 웃고 있는 장승을 바라보면서 웃음의 마법을 실감하게 된다.

웃음도 연습이 필요하고 습관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웃는 연습을 하지 않은 사람은 제대로 웃을 수가 없다고 한다. 웃어도 억지웃음이 되어 본인은 물론 상대방에까지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연습을 통해서 웃음 짓는 일이 몸에 배일 수 있도록 습관화한다면 그 사람은 행복이 보장된다고 한다.

웃음의 힘은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크게 웃게 되면 뇌를 자극하게 되고 자극을 받은 뇌에서는 면역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진다는 것이다. 뇌 과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심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에서 만나게 된 웃음 장승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였다. 인생은 한번뿐이고 나만의 삶인 것이다.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나에 의해 결정이 되고 불행한 생활을 하는 것도 결국 나에게 달려 있다. 웃는 연습을 통해서 밝게 웃는다면 인생을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풀꽃과 시간 

아주 작은 풀꽃과 길게 늘어뜨린 풀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작은 풀꽃은 그것대로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고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풀꽃은 그것대로 멋을 연출해내고 있다. 논두렁에 피어난 풀꽃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가는 세월을 그 누가 잡을 수 있단 말인가?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시간도 쉼 없이 흘러가고 있음을 풀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논두렁에서 살아가고 있는 풀들의 모습에 따라 세월은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 초록 이파리를 싹 틔우면 봄이고 꽃을 피워내면 여름이다. 그리고 곱게 물들여지면 가을이고 뿌리만 남긴 채로 시들면 겨울인 것이다.

풀들이 모습이 변화하면서 같은 모습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봄이 오면 봄의 얼굴을 하고, 가을이면 가을 얼굴을 한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면 새로운 봄을 준비한다. 그 모습이 모두 다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착각을 한다. 작년의 봄과 오늘의 봄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물이 흘러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증발이 되어서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한 번 흘러간 물은 다시는 돌아올 수가 없다. 작년의 봄은 분명 작년의 봄일 뿐이다. 올해 찾아온 봄과 같을 수가 없다. 올해 온 봄도 영원히 한 번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내년이면 또 다시 똑같은 계절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지나가버린 봄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 지나가버린 봄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다시 찾아오는 봄은 똑같은 봄이 아닌 것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건 또 다른 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올해 잘못하면 내년에 더 잘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 물론 사람이니 완벽할 수가 없다. 실수를 통해서 배우며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인생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비법인 것이다. 오늘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지금 이곳의 이 순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잠시 방심하는 마음으로 지금을 놓치게 되면 영원히 오늘을 되찾을 수 없다. 이 얼마나 중요한 오늘인가? 성실하지 않으면 오늘은 낭비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정말 무서운 현실이다. 단 한 번뿐인 오늘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일은 행복을 만드는 일인 것이다.

오늘을 성실하게 채우는 방법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 친절의 마법은 놀라운 것이다. 기적을 창출해낼 수도 있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친절을 베푸는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친절하게 대하게 되면 우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게 된다. 차디찬 시선으로 나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친절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난의 칼날을 날카롭게 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친절의 마법에 걸리게 되면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친절의 마법은 그만큼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친절의 마법은 그것 뿐이 아니다. 얽혀서 도저히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문제일지라도 친절의 마법이 발휘하게 되면 시나브로 해결이 되고 만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사형통이 되는 것이다. 친절의 마법은 정말 대단하다. 곤란을 극복하게 하는 것을 물론 암담한 현실을 즐거운 오늘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친절의 마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풀꽃을 보고서 기쁨을 찾아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평범한 풀꽃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논두렁의 풀꽃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전주시 봉동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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