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솟대와 새

솟대와 기원

"야! 솟대다. 한 두 개가 아니라 집단으로 있으니 느낌이 다르네."
하늘 높이 솟은 솟대들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한 두 개가 아니라 다수의 솟대가 무더기로 서 있으니, 바라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가다듬게 된다. 진정성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솟대가 서 있는 곳은 반딧불 축제가 열리고 있는 전라북도 무주다. 읍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천변에 세워져 있다. 솟대 아래에는 수많은 바람개비들이 돌아가고 있어 더욱 더 장관을 이루고 있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마도 그것은 깊은 곳 우리 정서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솟대가 세워져 있는 개천에는 섶다리가 놓여 있고 물 위에는 많은 뗏목들이 떠 있다. 뗏목에는 저마다 독특한 이름의 깃발을 달고 있으며, 그 위에는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다리 위에서는 각종 퍼포먼스가 이루어지고 있어, 이곳이 한창 축제 중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준다.

솟대는 소도에 세워져 있는 높은 나무를 말한다. 소도는 신성한 공간이다. 삼한 시대에는 이곳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곳이었다. 도둑질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곳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어쩌지 못하는 치외법권의 공간이었다. 솟대는 소도라는 것을 알리는 상징물이니, 그 권위는 대단한 것이다.

세월 따라 솟대의 권위는 상실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농가에서는 솟대에 대한 의미가 달라졌다. 섣달 무렵에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매는 매는 볏가릿대가 되었다. 정월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치며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놀이로 바뀌었다.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과 함께 솟대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매끈하게 긴 나무를 세우고 그 끝에 새를 나무로 깎아서 다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솟대를 세우고 간절하게 기원하게 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솟대는 부락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민족의 정기가 배어 있다. 우리의 DNA에는 이 모든 것들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니 솟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으로 바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한 표정으로 파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솟대의 새를 바라보면서 간절한 정성으로 기원하게 된다.

솟대의 새를 자세하게 보면 뭉툭하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전체를 보게 되면 정겨움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숨 가쁘게 살아가면서 시나브로 몸에 배어 있는 의식이 있다. 강한 자 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현실 속에서 느리고 약한 자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에서 살아가고 있다. 쫓기듯 살아가는 마음에 솟대는 위로가 된다.

아름다운 세상이란 어떤 사회일까? 강한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삭막하다. 숨이 막힐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결코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강한 자와 더불어 약한 자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솟대는 약한 자들이 힘을 펼 수 있게 해주는 축복을 주는 상징물이 아닌가?



솟대를 통해서 나눔의 미학을 떠올린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조화를 이루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존중하고 관심을 가지고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 세상은 신바람 나는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눈으로 나누는 것은 상대방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일이요, 환한 웃음을 짓는 것은 얼굴로 나누는 것이다. 소곤소곤 다정하게 소통하는 것은 입의 나눔이요, 겸손으로 나를 낮추는 것은 몸의 나눔이다. 이렇게 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는 길이다. 나눔의 미학이 실현되면 그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솟대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실천하지 않는 사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나눔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늘 높이 서있는 솟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반딧불 축제에서 반딧불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반딧불을 보기 위해서는 하룻밤을 무주에서 보내야 하는데, 그럴 처지가 되지 못하다. 2%가 부족해야 더욱 더 우뚝해질 수 있다고 하였던가?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환한 웃음을 바라보면서 행복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새의 나비 사냥 현장

전광석화와 같다.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다.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모습이 마치 공간 이동을 하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공간이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동작이 민첩하다. 물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새이니, 빠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였지만, 그런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재빠른 동작이다.



주변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폴짝 폴짝 뛰고 있다. 물론 시선도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아무 일도 없는 척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그리고는 눈에서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새의 부리에는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물려 있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냥한 나비를 곧바로 삼키지는 않았다. 그것을 땅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물고 다시 땅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 동작을 여러 번 되풀이하니, 나비는 이내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때서야 새는 부리로 나비를 물고는 먹는다. 하늘을 바라보며 나비를 먹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다.



새가 물속의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가 아닌 날개를 가진 나비를 사냥하여 먹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책을 통해서 얻는 지식이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간접 경험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관찰을 통해서 얻는 지식이 생생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전주 생태 박물관. 전주시에서 심혈을 기울여 개관한 곳이다. 오모가리 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벽당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박물관에 대한 기대는 크기만 하다. 전통 한옥 거리가 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서 전주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 전주의 명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천주교 성지인 차명자 산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박물관 앞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전주천은 전주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으로서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천연 기념물이 수달이 목격되고 또 원앙새가 발견됨으로서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해준 곳이기도 하다. 도심의 한 가운데를 흐르면서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민들의 하천 사랑이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문을 열게 된 곳이 바로 전주 생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대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것이나 대학생들의 식물 채집물을 전시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무엇이나 처음에는 부족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완하고 보충해가는 것이란 위안을 삼는다. 

박물관 내의 전시를 돌아보고 실망한 마음을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달라졌다. 계획적으로 심어놓은 다양한 식물들이며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전주천의 모습이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태를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새가 나비를 사냥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곳이 바로 그 전주천 옆의 오솔길이다. 잘 정리되어 있는 길 위에 새 한 마리가 나비를 사냥하여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아 있는 생태계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전주 생태 박물관이 전주의 명소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정기상님은 전북 완주 봉동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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