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자귀나무꽃 필 때가 되었나?
벌써 자귀나무꽃 필 때가 되었나?
  • 승인 2008.07.1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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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자귀나무와 버찌

자귀나무와 삶

감탄사가 나온다. 멀리서 보아도 시선을 잡는다. 초록이 싱그럽게 빛나고 있다. 거기에 분홍과 연보라의 고운 색깔의 꽃을 피워내고 있으니, 더욱 더 매혹적이다. 가는 걸음을 멈추게 한다. 어찌나 돋보이는지, 주변이 환하다. 꽃이 피어 있음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초록과 분홍의 조화가 독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벌써 자귀나무 꽃이 필 때가 되었나? 꽃을 바라보면서 헤아려보니, 벌써 7월이다. 세월이 정말 무섭다. 어찌 그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2008년이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절이 가버렸다. 실감나지 않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당혹스럽다.
자귀나무는 미모사가 자극을 받으면 움츠러들듯, 밤이 되면 양쪽으로 잎이 서로 포개진다. 접혀질 수 있는 구조를 복엽이라고 한다. 오묘한 생명의 경이다. 그래서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합환목 또는 합혼수 그리고 야합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가 자귀나무 잎을 무척 좋아하여 소쌀밥나무라고도 한다.
야생에서 흔히 볼 수가 있는데, 요즘은 가로수로도 많이 심어져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방에서는 신경쇠약 불면증을 치료하는데 사용되고 있고 신경통에도 좋다는 속설이 있다.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나무 자체는 약용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고마운 나무가 분명하다.



꽃이 어찌나 고운지,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 저리 색깔이 선명한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꽃을 바라보면서 꽃처럼 빛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꽃처럼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삶이라면 우아하고 모든 이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문득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으면서 무슨 욕심이 이리도 큰지 알 수가 없다. 뭔가를 이룰 수 있는 때는 모두 다 지나버리지 않았는가? 이제는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해야 할 때이다.

노자는 말했다. 깨달은 자는 빛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빛나게 된다고 하였다. 자신을 돌보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내세우지 않기에 권력이 생성될 수 있고 대항하지 않기 때문에 맞서는 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젊었을 때 이런 글을 읽었을 때에는 무시하였다. 쓸 데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자기 PR 시대에 살아가면서 어찌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반문하면서 나를 나타내기 위하여 더욱 더 노력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이런 생각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지를 깨닫게 된다.



가난하였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때만큼 좋았던 시절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좋았던 것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돌아보니, 좋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난감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삶은 허망하고 서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행복하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자귀 꽃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반추한다. 한 번 뿐이기에 더욱 더 애달픈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흐르는 물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행복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짝이는 별

"야! 별이다." 반짝이는 별이다. 한 두 개가 아니라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니라 환한 대낮에 떠 있는 별이다. 어찌나 반짝이는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까만 별이 있는가 하면, 빨간 색 별도 있다. 까만색은 그것대로 멋이 있고 빨간 것은 그것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청풍 문화 단지(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내의 벚나무에 버찌가 익어가고 있다. 충주댐으로 인해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던 다양한 문화재를 한 자리에 모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청풍 석조 여래 입상(보물 546호), 청풍 한벽루(보물 528호) 등을 비롯한 보물급 문화재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재들이 한 곳에 모아져 있어 의미가 있는 곳이다.

버찌를 바라보면서 잃어버리고 있던 밤하늘을 떠올리게 된다. 언제였던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정신없이 달려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 나 자신이 달려온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무엇을 쫓아 그렇게 헐떡거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돌아보면 숨이 가쁠 정도로 힘든 것들 뿐이다. 쇠고기 수입 문제로 인해 촛불이 켜지지 않는 날이 없고 서민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다. 이미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 행진을 하고 있고 수출입마저 적자로 돌아서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내일에 대한 기대마저도 형편이 없다. 모든 것이 하양 곡선을 긋고 있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열심히 일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는데, 그 결과가 이러니 허탈하기만 하다. 앞만 보고 뛰다 보니, 뒤를 돌아다볼 여유가 없었다. 밤하늘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본지가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있는 힘을 다 하여 뛰었는데….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여름밤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누워있으면 별들이 쏟아져 내려왔었다. 어찌나 별들이 많은지, 바라보고만 있어도 감미로웠다. 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루하지 않았다. 별들에게 몰입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짧은 밤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별을 잊어버린 지가 참 오래 되었다. 오염이 되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절대 수가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그 것은 핑계일 뿐이다. 도시의 밤하늘에도 분명 별은 떠 있다. 어린 시절의 쏟아지는 별처럼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별들은 반짝이고 있다. 단지 그 별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버찌를 바라보면서 실패한 경험을 떠올린다. 실패를 하였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싫증을 내고 포기하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하였던가? 실패는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내일을 열어갈 수 있다. 실패는 보람차고 멋진 삶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체험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버찌는 말하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어려움과 고통은 늘 상존한다. 걸어온 길이 그것을 말한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고통을 받았던 때도 있다. 고개를 넘을 때의 아픔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기고 무사히 넘을 수 있었다.

사면초가다.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오천년의 역사를 돌아다보면,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지혜와 슬기로서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났다. 이런 때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찾아야 한다.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버찌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조급한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바늘  허리에 실을 묶어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가중시킬 뿐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 하지 않았던가? 소통이 되지 않으면 소통이 될 수 있도록 여유를 가져야 한다. 여유는 슬기를 찾을 수 있는 바탕이다.

풀리지 않을 때, 그리고 해결 대안을 찾을 수 없어 막막할 때 여유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문제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여유로 문제를 분석해보면 의외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지혜로운 겨레다. 오천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어려울수록 더욱 더 힘을 모으는 민족이기도 하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되찾게 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버찌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현실을 반추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절실한 때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면서 돌아갈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때다. 까맣게 빛나는 버찌처럼 내일을 열어가야 할 때다. <춘성 정기상님은 전북 봉동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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