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는 왜 북녘에서 대우받는 것일까?
천도교는 왜 북녘에서 대우받는 것일까?
  • 승인 2009.01.0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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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의 남이랑북이랑> 민족종교 천도교 이야기

천도교는 북녘에서 제1의 종교다. 개신교나 불교보다 더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다. 무엇보다 김일성과 천도교의 개인적 인연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하다 1926년 죽음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아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보냈고, 가족에게도 그를 중학교까지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김형직의 장례식에 모인 동지들은 아들 성주(김일성)에게 화성의숙으로 진학하라고 권고하였다. 화성의숙은 1925년 1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독립군 간부들을 키워낼 목적으로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는데, 교장이 김형직의 친구인 천도교도 최동오였다.



김일성은 화성의숙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고, 정치교육과 함께 군사교육을 동시에 받을 수 있으며, 그곳에 끌끌한 청년들이 많다는 등의 이유로 화성의숙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학비를 댈 힘이 없으면서도 상급학교에 갈 희망과 아버지의 뜻을 이어 조국광복의 길에 나서려는 포부를 동시에 품고 있는 나로서는 그보다 더 이상적인 교육환경과 조건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동오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자신의 아들을 고아원에 맡겨놓은 상태였지만, 친구의 아들인 김일성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최동오를 비롯한 화성의숙의 천도교인 교사들은 수업을 통해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천도교의 보국안민(輔國安民) 사상을 주입시켰을 테고, 김일성은 이들을 통해 천도교를 경험하고 이해하면서 감화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겨우 한 학기를 마친 뒤 화성의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친구들과 연고자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학교였지만, 거기서 "전 세대가 남긴 사상과 방법에서의 낡은 잔재"를 발견하면서 공산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선진사상에 심취되면 될수록 화성의숙의 교육으로부터 멀어져갔는데, 그는 화성의숙을 떠나면 자신을 거기에 보내준 아버지 친구들의 믿음을 저버리게 되고 아버지의 뜻도 어기게 되는 것 같아 헤어나기 힘든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장례에 참가하려고 수백리를 달려와 자신을 위로해주고 노자를 찔러주며 화성의숙으로 보낸 아버지 친구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죄송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최동오와의 작별이 가장 괴로웠다는 것을 회고하기도 했다.

김일성이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종교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교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면서도, "천도교야 하늘을 믿어도 조선의 하늘을 믿지 않느냐"며 천도교에 호감을 표시한 것은, "조선을 독립시키는 주의라면 나는 민족주의건, 공산주의건 상관하지 않겠네"라고 격려했던 최동오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김일성이 20여년 뒤 최동오와 평양에서 감격적으로 다시 만났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서다. 최동오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화성의숙 숙장으로 지내기도 하다가,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면서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50년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은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등과 함께 최동오를 북녘으로 모셔갔다. 남쪽에서 보자면 납북되었다는 말이다. 최동오는 북녘에서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의 간부로 일하다 1963년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1986년 그의 아들 최덕신이 북녘으로 망명하였다. 2008년 현재까지 남쪽으로 망명한 북녘 최고위 당국자 출신이 황장엽이라면, 북쪽으로 망명한 남쪽 최고위 당국자 출신은 최덕신이었다. 그는 1936년 만주에서 중국육군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장교로 복무하며 항일전에 참가했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중에는 남쪽 사단장으로 북녘 인민군과 싸웠고, 휴전회담 때는 한국군대표를 맡았으며, 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56년부터 베트남주재 대사, 외무부장관, 서독주재 대사로 일하다 1967년 천도교 교령 자리에 올라 한국종교협의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몇 차례 북녘을 방문한 뒤 1986년부터 평양에 정착해버렸다. 이후 평양에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종교인협의회 회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지내다가 1989년 사망하여 아버지 최동오가 안치되어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최덕신의 아내 류미영은 상해임시정부 간부였던 천도교도 독립운동가 류동렬의 딸로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단군민족통일협의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공동의장 등을 맡아오면서, 2000년 8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북측 단장을 맡아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형직과 최동오의 동지애, 그리고 김일성과 최덕신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두 집안의 특별한 인연은 북녘에서 천도교가 가장 세력이 큰 종교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두 집안의 특별한 인연 말고도 최덕신이 말한 대로, 천도교가 "우리 배달민족 안에서 나온 종교", 즉 민족종교라는 점도 북녘에서 대우받는 배경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녘에서는 천도교의 뿌리인 동학에 대해 "19세기 중엽 최제우가 만들어낸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철학 사상"이라며, 여기엔 "가혹한 착취와 압박, 외래 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농민, 수공업자를 비롯한 인민들의 자주적 요구가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천도교청우당에 대해서는 "1946년 2월 8일에 `보국안민`의 애국사상과 `척양척왜`의 자주정신으로 제국주의의 침략과 예속을 반대하고 민족적 자주와 부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사업에 참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천도교를 믿는 농민들을 주로 하여 조직된 민주주의적 정당이다"고 소개하고 있다.

천도교가 북녘에서 이렇게 민족종교로 대우받고 있는 탓인지, 1990년대에도 남쪽의 천도교 최고지도자가 월북했다. 1986년 최덕신 교령에 이어 1997년 오익제 교령이 북녘행을 택한 것이다. 오익제는 남쪽에서 국방부 문관과 통일광복민족회의 의장 등을 지내다 천도교 선도사, 종무원장, 종학원장 등을 거쳐 1989년부터 천도교 교령을 맡고 있었는데, 북녘으로 넘어가서는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고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한편으로는 종교가 남북의 화해와 교류 협력에 선구자역 역할을 해온 측면이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단의 상처를 드러내며 심화한 측면도 있는 셈이랄까.

<이재봉님은 원광대학교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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