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내장사에서

불끈하는 초록의 역동성

초록의 힘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불끈불끈 솟구치는 역동성.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괴력의 힘으로 두꺼운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민 새싹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다. 새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당당한 얼굴로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모습이 그렇게 멋질 수 없다.

천하명승 내장산의 내장사.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는 내장사는 가을뿐만 아니라 봄에도 또 다른 멋진 풍광을 연출해낸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산이란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새싹들의 역동성이 상춘객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준다. 겨우내 침잠되어 있던 기분을 한껏 일깨운다.



전주에서 출발, 1시간 여 만에 도착한 내장사. 새로운 도로가 개통되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편리하게 도착할 수 있다. 가을 내장사가 아니니,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산사의 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케이블카가 운행이 될 정도다. 묵은 겨울의 찌꺼기들을 말끔하게 털어내기 위해 산사를 찾은 것이리라.



입구 탐방소 앞 나무 가지에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꽃봉오리가 맺혀 있다. 꽃이 활짝 피어나진 않았지만 붉은 홍매라는 사실을 금새 알 수 있다. 나무 전체의 구석구석에 맺혀 있는 꽃봉오리들은 아직은 때가 아닌 듯, 봉오리인 채로 피어날 준비에 한창이다. 그런데 한 송이는 이미 피어 있다.

생명의 경이다. 아니면 기다릴 줄 모르는 급한 성정이 때이른 개화를 재촉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섭이 미소를 지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결과인지도 모른다. 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뭔가 전하고 싶은 절실한 내용이 있기에 미리 피어나서 웃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은 말한다. 겉모습만을 보지말고 마음을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음을 보면 인생이 보이고 우주가 보인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바라는 돈도 보이고 행운도 보인다. 환하게 볼 수 있다면 팔자를 바꿀 수 있고 운명도 개척할 수 있다. 한번뿐인 인생이니,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은 말한다.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고. 버려야 할 것은 많다. 우선 분별심을 일으키는 편견을 버려야 하고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차별하지 않게 될 것이고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만에서 벗어나면 겸손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분노와 미움도 함께 버릴 수 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불길을 잠재우는 일은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련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상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집착으로 인해 힘든 과정이다. 이 모든 것을 버려야 본래의 마음을 볼 수 있고 볼 수 있게 되면 편안해질 수 있다.



본 마음을 볼 수 있다면 걱정은 절로 사라진다. 오늘 걱정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로등 불빛 환한 곳에서 길 잃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홀로 피어나 찾아오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홍매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본래의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라고.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니, 투명한 연못이 반겨준다. 어찌나 맑고 고운지,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뭍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투명하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선화의 위대함

곧게 치든 기세가 당당하다. 두려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자신감이 철철 넘쳐난다. 파란 하늘을 향하는 모습이 우뚝하다.

대웅전 옆 오래된 석탑 아래에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새싹이 2%가 부족한 세상을 채워주고 있다. 연록의 당당한 기세가 우주를 구족하게 채워주고 있다. 완벽한 세상의 완성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근심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문득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초록으로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통해 가슴에 각인되어 있는 얼굴들이 되살아났다. 왜 그 때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후회가 앞선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작은 오만이 그들의 가슴을 허허롭게 했다. 나의 독단과 아집 때문에 님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함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먼 허공을 바라보게 했다. 맑고 향기로운 님의 마음에 흠집을 냄으로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게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수선화를 바라보면서 넉넉했던 님을 그리워한다. 상처 주는 줄 알면서도 오기가 발동해 아프게 해도, 님은 언제나 웃었다. 힐책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로 수용했다. 왜 그 때는 몰랐을까? 그것이 얼마나 소증하고 아름다운 덕목인지, 왜 몰랐을까? 어리석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님은 내 곁에 없다. 떠나고 난 뒤에서야 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세월 따라 그렇게 잊혀질 줄 믿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선화를 보니,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 아니 더욱 더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그 때 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반성하게 된다.

수선화를 보면서 이제는 멀어져버린 님들을 그리워한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어우러져 하나가 되고 싶다. 산사의 봄을 완성시키고 있는 수선화처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에 묻혀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내장사의 봄 속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수선화의 새싹에서 산사에 봄이 왔음을 확인할 수 있고 나뭇가지에서 봄을 느낄 수 있다. 붉은 기운이 넘쳐나는 나뭇가지에는 어김없이 새눈이 돋아나고 있다.



산사의 봄을 만끽하면서 겨우내 묵은 것들을 홀가분하게 털어버렸다. 수선화 새싹에서 역동성을 얻었고 나뭇가지의 봄기운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못처럼 겉과 속이 똑같아지기를 기원했다.

산사에 넘쳐나는 봄기운이 몸과 마음을 일신시켜주었다. 가뿐한 기분으로 한껏 재충전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완주 봉동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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