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철희의 바라래 살어리랏다> 문헌속 소금이야기

사람에게 필수불가결한 소금은 식품 외에도,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영어 `Salt`의 어원은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군인들의 봉급이란 뜻으로 로마시대에는 관리나 군인들의 봉급으로 소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다고도 한다.

‘소금장수 사위 보았는가.’ 뭐가 그리 좋은지 괜히 히죽거리는 사람에게 하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다. 소금장수 사위를 두었다면 적어도 소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옛날 기방에서는 가장 후한 대접을 받은 손님이 바로 ‘염서방’이었다고 한다. 화채로 소금자루를 메고 온 손님이었으니 대접을 후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소금은 부패를 막아주고, 청결을 유지시켜주는 물질로 인식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썩지 않게 소금물에 담가 미라를 만들었는데,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썩지 않고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소금이 부패방지에 얼마나 유용한 물질인지를 알 수 있다.



또, 소금은 부정을 물리치는 신성한 물질로 인식되기도 했다. 지금도 모로코에서는 어두운 곳을 다닐 때는 몸에 소금을 지닌다고 한다. 병균을 막아주고 몸을 보호해 준다는 주술적 의미이다. 또 태국에서는 출산 후 매일 소금물로 몸을 씻는 풍습이 전해온다는데 이는 청결유지에도 이유가 있지만, 악귀를 쫓고 몸을 신성시하는 불교적 풍습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부정을 물리친다며 소금을 뿌리는 풍습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또, 근대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소금을 의약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양의학에서 구급약으로 쓰이는 링거도 소금물을 정수 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 B.C 65~8)는 “소금과 빵은 기아를 정복하고, 뺨의 색을 붉게 하네, 소금과 빵이 있으면 생활하기에 넉넉하네”라고 노래했다.



한의학에서는 소금의 의약품 활용이 훨씬 더 많다. `주례(周禮)`에는 신 것으로 뼈를, 단 것으로 살을, 매운 것으로 힘줄을, 쓴 것으로 기를, 매끄러운 것으로 코·입 등의 구멍을, 그리고 짠 것으로는 맥을 기른다고 했다.

`북호록(北戶錄)`에는 소금은 살과 뼈를 굳게 하고, 독충을 제거하고, 눈을 맑게 하며, 기운을 돋운다고 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소금을 달고, 짜며, 찬 것으로 독이 없다고 하며, 위와 명치 아픈 것을 치료하고, 담과 위장의 열을 내리게 하고, 체한 것을 토하게 한다고 했다. 복통을 그치게 하고, 독기를 죽이며, 뼛골을 튼튼하게 하고, 살균작용이 있어 피부를 튼튼하게 하고, 위장을 튼튼하게 하며 묵은 음식을 소화시킨다고 했다. 또 식욕을 촉진하고 소화를 도우며, 답답한 속을 풀고, 부패를 방지하고, 냄새를 없애며, 온갖 상처에 살이 낫게 하고, 피부를 보호하며, 대소변을 통하게 하고, 오미(五味)를 증진하고, 소금으로 이를 문지르고 눈을 씻으면 잔글씨를 보게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 의약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는 "소금은 맛이 짜고 따뜻하며 독이 없다. 흉중의 담벽을 토하게 하고, 심복의 급통을 그치게 하며, 기골을 견고하게 한다. 악물을 토하거나 설사하게 하고, 살충하고, 눈을 밝게 하고, 오장육부를 조화하고 묵은 음식을 소화시켜 사람을 강건하게 한다"고 돼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저자 이규경은 `추염변증설`에서 “소금은 백미(百味)의 어른이다. 이것이 없으면 비(脾)·위(胃)를 진정하기 어렵고, 기혈(氣血)을 도울 수 없다”고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소금은 본성은 따뜻하고, 맛이 짜며 독이 없다. 귀사(鬼邪)와 고사증(蠱邪症)을 다스리고, 중오(中惡)와 심통(心通)과 곽란( 亂)과 심복(心腹)의 급통(急通)과 하부(下部)의 익창을 고치고, 흉중(胸中)의 담벽(痰癖)과 숙식(宿食)을 토하고, 오미(五味)를 도우니, 많이 먹으면 폐(肺)를 상하고, 해수(咳嗽)가 나며, 끓여서 모든 창(瘡)을 씻으면 종독(腫毒)을 던다”고 하였다.

이렇듯 그 필요성이 절대적인 소금은 왕조의 성쇠를 좌우하기도 했다. 소금을 장악하는 것은 곧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천연으로 만들어진 소금을 로(鹵)라 했고, 가공한 소금을 염(鹽)이라 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두 염(鹽)자를 쓴다. 염(鹽)자는 `臣, 人, 鹵, 皿`의 낱자가 모인 것으로 문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소금을 그릇에 담아 신하가 깃발을 세우고 지킨다는 뜻으로 소금의 권위와 전매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 하(夏)나라 때 이미 소금에 과세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춘추전국시대에는 제나라의 관중이 소금 전매제로 나라 재정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한나라는 사염을 엄격히 금했으며 밀매하는 자는 왼쪽 발가락을 자르는 형벌로 다스렸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노예들이 상류층에 생선과 소금을 공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태조 때에는 소금을 국가재정의 원천으로 삼고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여 소금 전매제를 실시했다. 조선도 융통성 있는 염제를 운영했다. 그러나 고려나 조선 말기에는 과도한 통제 등으로 제염업이 쇠퇴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소금 제조방식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자염’으로 전북 부안의 해안가 곳곳에서도 소금을 구웠다. 특히 계화면 창북리에는 나라의 소금창고 있었으며, 그런 연유로 그 마을에 있는 산 이름이 염창산(鹽倉山)이고, 여기서 파생하여 마을 이름도 창북리(倉北里)가 되었다.

근대 들어 일제는 관 주도로 해안가 곳곳에 염전을 조성하고 이를 확대시켜나갔다. 해방 후에는 민간인에게도 염전개발을 허용하였다. 지금은 대한염업조합이 우리나라의 염업을 관장해 오고 있으나 최근 들어 값싼 수입염으로 인해 우리나라 제염업 기반은 무너져 가고 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한국산 천일염이 외국산 천일염에 비해 성분상에서 특히 미네랄 함량이 높다는 사실이 속속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데다 국민들의 천일염에 대한 인식 또한 높아지고 있다. 더하여 지난해 봄(2008년 3월 28일)부터 천일염이 식품으로 정식 인정받게 됨에 따라 유통업체들이 앞 다투어 천일염 판매를 시작하고 있다니 한층 더 고무적이다. 그동안 국내 소금 소비량의 43%를 차지하고 있는 천일염이 1963년 염(鹽) 관리법에 의해 광물로 분류되면서, 법적으로는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바람에 유통업체들의 공식적인 판매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늦게라도 천일염이 식품으로 정식 인정되었다니 우리나라 제염업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본다. <허철희님은 자연생태활동가로 `부안21`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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