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 기자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 남한산성 편

병자호란 때 인조와 소현세자가 47일간 머물렀고,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임금이 능행길에 이용했던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은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이기도 하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도 전해진다.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서 분당선으로 갈아탄 후 복정역에서 다시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에 내린 시간이 낮 12시. 날씨가 무척 덥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려나.

중앙로를 따라 을지대학을 지나니 남한산성유원지가 나온다. 유원지 입구에선 인근 주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남한산성도립공원 관리사무소와 성남시 민속공예전시장 사잇길이 남문 가는 코스다. 입구에 맨발 지압장이 나타난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들고 자갈길을 5분 정도 걸었다. 발바닥이 뜨끔뜨끔한 게 혈액순환이 잘되는 듯 하다. 준비운동은 끝냈으니 이제 슬슬 산 좀 타 볼까.


남문을 향해 조금 올라가다 보니 도처에 신선(神仙)들이 유유자적하고 있다. 공기 맑은 산중에 한쪽에선 장기판, 또 다른 쪽에선 바둑판을 마주 놓고 삼매경에 빠져 있다. 속세의 시름 다 잊고 무아지경에 빠진 그들의 모습이 부러울 뿐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여의도의 정치판, 그야말로 개판. 같은 하늘아래 똑같은 판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에이 몹쓸 철판.

심신수련장, 약사사, 영도사, 덕운사 입구를 지난다. 그 사이에 약수터를 세 곳이나 거쳐왔는데 모두 음용 불가다. 준비해 간 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수(山水) 맛이 최곤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우리 모두 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다.

마지막 사찰인 백련사를 뒤로 하고 비닐하우스로 만든 헬스체육관 앞에 이르니 중원약수터가 나온다. 빈 병에 물 채우는 모습들을 보니 음용가능이렷다. 한잔 쭉 들이킨다. 캬∼시원하다. 하늘도 웃는다.

십 여분 후 나타나는 지화문(至和門). 남한산성의 남문(南門)이다. 관리사무소를 출발한지 40여 분 걸렸다.



남문은 남한산성 서남쪽 해발 370m 지점에 있으며, 선조 때 남문·동문 등을 수축(修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개축하면서부터 지화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문은 홍예문으로,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m이며 홍예기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들었다. 성문 우측은 검단산 정상 가는 길이다.

남문 안으로 들어가니 푯말(←수어장대 1km, 남한산성유원지 2km↓)이 다음 길을 안내한다. 수어장대 가는 길은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과 우측의 차량통행이 가능한 시멘트 포장길, 어느 쪽으로 가도 무방하다. 길가의 고욤나무, 층층나무, 서어나무 등이 그늘을 제공해 준다.

영춘정(팔각정) 가는 중간에 나타나는 야외 주막. 여기저기서 막걸리 판이 걸쭉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름하여 ‘남한산성욕쟁이할머니 잔치국수(010-4114-4351)’집이다. 간판은 잔치국수가 주메뉴인데 온통 술판이다. 배낭 속 막걸리가 속삭인다. 자기도 여기 잘 있다고….

영춘정 성곽 아래로 성남시가 한 눈에 들어오고, 남서쪽으로는 청계산과 관악산이 보인다.

그리고 10분 후, 남한산성에서 제일 높은 청량산 정상인 청량당 옆 수어장대로 들어선다.



경기도 유형문화재1호인 수어장대는 산성 지휘본부였다.

이 일대에서 보면 인근 성남지역은 물론 서울 김포지역까지 훤히 내다보인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청량당은 산성 축성 시 공사 책임을 맡았던 고급관리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청량당에서 5분 거리에 이르면 오른쪽 둔덕 위 숲속에 뾰족한 병암(屛岩)이 보인다. 정조 때 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주민들이 자진해 보수했다 해서 당시 부윤(府尹)이 주민들을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기록한 것이다.

병암에서 5분 더 가면 서문에 닿는다.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은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해 당시 물자를 수송하기에는 미흡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문의 폭은 1.46m, 높이는 2.1m 이다. 동문처럼 홍예식으로 장방형 홍예 기석위에 5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이 서문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말에서 내려 청나라에 항복을 하러 삼전도 수항단으로 갈 때 통과한 문이다.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발걸음 내딛는다.

직진하는 성곽 안길로 4~5분가면 연주봉 옹성으로 드나들던 암문에 닿는다. 암문 정면 동장대로 이어지는 긴 성곽이 시야에 들어온다. 성곽을 마주보며 10분 거리인 북장대지(北將臺址)를 지나 5분여를 내려가니 종로로터리 방면 길과 만나는 북문이 나온다. 인조 2년(1624)에 신축되어 정조 3년(1799)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개축한 후 전승문(戰勝門)이라 이름 붙였다. 현재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성문은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석을 쌓아 만든 홍예문으로 높이 3.65m, 폭 3.25m이다. 성벽의 두께는 7.1m에 이른다.

이후 작은 군포지~큰 군포지 수구~동장대 암문을 경유해 남한산 정상으로 향한다.

남문에서는 남쪽 성곽인 제1남옹성~제2남옹성~남장대지~제3남옹성~동문~송암정터~장경사~장경사신지옹성~동장대로 산행을 이어도 된다.

성남시 남한산성입구 전철역을 출발해 관리사무소~백련사~남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북문~큰 군포지 수구~동장대를 경유해 남한산 정상에 이르는 산행거리는 약 7.5km로, 4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북문에서 종로로터리(유원지 입구)로 내려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지인과 오랜만에 해후를 한다. 만해기념관 인근에서 적절한 대폿집을 찾았으나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지인이 제의한다.

“남문을 지나면 나오는 남한산성 전철역 근처 시장통 ‘포장마차촌’으로 가서 한 잔 하자.”

남문에 도착하니 하늘에 낀 먹구름이 어느 새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되어 온 몸을 적신다. 마음이 바빠진다. 20여 분 가까이 초고속으로 내달린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린다. 때마침 비닐하우스 헬스장 옆 팔각정이 눈에 들어온다. 배낭에서 막걸리와 토마토 삶은 계란 꺼내서 돗자리 깐다. 산속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지인과 주고받는 대폿잔이 이렇게 감미로울 수 없다. 비록 비에 젖어 옷은 축축하지만. 기자 때문에 애꿎은 지인 머리모양이 비 맞은 생쥐 꼴이다. 그래도 신이 나서 두 사람 술잔 연신 부딪힌다. 시간이 지나면서 팔각정 안은 손님으로 꽉 찼다. 사방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걱정하는 가족들이 안녕한지 물어오는 전화다. 약 1시간 여를 지나니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졌다. 두 사람 다시 빗속을 걷는다.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은행시장 안 ‘웰빙포차(010-2328-3126)’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남은 회포를 푼다. 각자의 삶터로 돌아간다.
선임기자jkh414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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