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서울 인근 역사 문화재 탐방: 이화장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난해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에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이화장을 다녀왔습니다.




# `조각당`에서 바라본 이화장 전경. 예전엔 더 넓고 건물도 더 많았다고 한다.


이화장에 이사와서

동대문 북쪽 낙산 앞에

이화동 옛골짝에 새로 집터 잡아오니

보신각 종소리는 잔비 속에 들려오고

종남산 그림자는 구름 가에 보인다네

아이는 눈을 쓸어 소나무밑 길트이고

아낙네 어름깨어 바위사이 물긷는다

집안이 작다 한들 그어찌 마달손가

숲속과 계곡에는 풍연이 가득하니

(이승만 자작 한시 `이화장에 이사와서`)


이 시는 1947년 10월부터 이화장에 살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 해 겨울 지은 것이다. 그가 이 곳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는지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종남산은 남산의 또 다른 이름이니 빗속에서 들려오는 보신각 소리와 함께 그림 같은 풍경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가끔 이곳에 들러 정원과 뒷산을 거닐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화장에서 지냈고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한달 정도 잠시 머물렀다. 모두 합쳐도 채 1년이 안 되는 셈이다.

1960년 4월 27일, 하야 직후 이화장으로 돌아온 이 전 대통령은 담장 밖을 내다보며 동네 주민들에게 놀러오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달 남짓 후 결국 하와이로 극비 망명을 떠나야 했던 비운의 장소가 이화장이기도 하다. 이 전 대통령이 다시 이화장과 재회한 것은 하와이에서 서거한 뒤 시신이 이 곳에 운치될 때였다. 이 전 대통령 서거 후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까지 여생을 보냈다.




#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입구에서 관람객들을 맞는다.


"30대 떠나 70대 귀국"

이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과 함께 해방 전후사에서 거대한 양대 산맥이었다. 30대에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난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70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는 당시의 감회와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삼십에 고국떠나 칠십에 돌아오니

유럽과 미국땅이 꿈속에 생생하다

내집에 있는몸이 오히려 나그네요

곳곳에 만난사람 구면이 거의없네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화장은 그동안 서울시 문화재로 관리돼 오다 올해부터 사적으로 격상돼 더 나은 지원을 받게 됐다. 이 전 대통령이 초대 내각을 발표했던 `조각당` 등의 역사성과 격변기 한옥의 변천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안채


이화장의 공식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산1-2다. 바로 뒤 산1-1 자리엔 조그마한 마당에 풀들이 무성한 채 아주 오래되고 낡은 주택이 ㄷ자 형태로 자리하고 있어 이화장과 묘한 대치를 이룬다.

이화장으로 가는 길은 혜화역에서 가는 방법과 낙산을 거쳐 가는 코스가 있다. 이왕 발품을 팔아야 한다면 서울성곽과 비우당, 동망봉 등을 함께 볼 수 있는 낙산쪽이 좋다. 이화장의 경우 경교장과 달리 예약방문이 이뤄지기 때문에 최소한 당일 오전엔 전화로 예약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분증을 안내소에 맡겼다 관람이 끝나고 찾아가면 된다.

양자 내외 `별채` 거주

예로부터 `배밭`이 많다고 해 이름붙여진 이화동은 낙산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도 빼어난 절경을 갖춘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과 인평대군의 석양루가 있었을 정도로 한양 도읍의 명승지였다. 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도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은 그런 `낙산` 자락 바로 앞에 세워졌다. 이 전 대통령은 1947년 10월부터 이 곳에서 살다 대통령에 당선되며 경무대로 옮겼다.










# 위로부터 서재, 침실, 부엌


이 전 대통령이 이화장에서 살게 된 계기는 이렇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그의 돈암동 생활을 안쓰럽게 여긴 실업가 권영일 등이 돈을 모아 이화장을 마련해 준 것으로 전해진다. 전북 정읍 인근의 세도가 의성김씨 김백섭이 사정상 헐값으로 넘겼다고 한다.

현재 이화장은 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안채와 조각당, 그리고 새로 지은 살림채가 있다. 아래쪽 별채엔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 며느리인 조혜자씨가 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국부`와 `독재자` 사이에서 논쟁이 치열한 터라 경교장에 비해 개방에 조심스런 분위기다.

이 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조각당은 역ㄱ자 형태의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 조직된 곳이다. 마루와 작은 방 하나가 전부며 조각 당시 쓰던 돗자리와 나무 의자가 전시돼 있다. 방안 벽면엔 이 전 대통령이 붓으로 직접 쓴 `남북통일` 액자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조각당 현판은 1987년 제헌절에 제헌국회의원들이 모여 만들었다고 한다.








# `조각당` 외부와 내부 모습


ㄷ자 형태인 안채는 5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됐는데 이 전 대통령의 서재, 침실, 부엌 등이 복원됐고 가운데엔 흉상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서예 작품이 걸려있다.













#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의 유품들


`이념전쟁`은 현재진행형

전시관 입구엔 방명록과 함께 `제주 4·3 폭도를 희생자로 결정한 잘못을 시정하라는 탄원서명`이 나란히 책상위에 올려져 있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념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이 전 대통령 내외가 사용했던 부채, 문방구, 의류 등 다양한 유품들은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한국전쟁 당시 입었던 군용파카, 은신 때 사용했던 중국 복장, 타자기와 라디오, 하와이에서 사용했던 식탁, 국제낚시대회 우승컵 등이 눈길을 끈다. 전시관 밖엔 이 전 대통령의 행적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돼 있는데 그가 사슴과 함께 이화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원에서 사슴과 함께 여유를 즐기고 있다.




# 하야 직후 이화장으로 돌아온 이승만 전 대통령



정원 곳곳에는 불상으로 보이는 조그만 석상 몇 개가 눈길을 끈다. 이화장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저 석상들은 모두 전 주인들 것인데 유물 가치를 생각해 그냥 놔둔 것으로 안다"며 "일부는 한국전쟁 당시 파손됐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석상 몇 개는 파손된 채 한쪽에 놓여져 있었다. 입구쪽엔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엔 정조 때 서화가였던 강세황이 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




# 정원의 석상들

"정운찬도 이 근처에서"

해방 전후 시기 이화동 인근엔 서울에서도 괜찮은 집안들이 모여살았다고 한다. 고위 장성이나 관료, 은행원, 기자 등 엘리트층들이 낙산 근처에 집터를 잡았다. 이화장은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었는데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최근 뉴스메이커로 떠 오른 정운찬 총리 후보자도 어린 시절, 지금은 없어진 창경초등학교를 다니며 이화동 인근에서 살았다. 정 후보자는 충청도 공주시 탄천면 분강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초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화동 인근엔 부유층도 많았지만 정 후보자처럼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았다. 낙산 건너 창신동은 과거 암울한 시절, `빈민`을 대표했던 동네다. 인근에서 오래 살았던 한 주민은 "가난했지만 공부 하나는 정말 잘했다"고 정 후보자를 기억했다.

매일경제신문 장대환 회장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장 회장을 기억하는 주민은 "장 회장의 경우 부친이 군 장성이어서인지 아주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얘기했다. 

이화장 바로 위쪽으로는 `홍덕이밭`이 있다. 낙산 아래 동숭동에 있던 이 밭은 효종과 얽힌 사연이 전해온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이 불모로 잡혀 심양에 머물게 됐다.





이때 효종을 모신 나인이 홍덕이라는 여인이다. 홍덕은 심양에서 채소를 가꿔 김치를 담가 매일같이 효종에게 올렸다. 효종은 훗날 이 김치맛을 잊지못해 낙산 중턱의 채소밭을 홍덕에게 줘 궁궐 김치를 대게했다고 한다. 홍덕이밭 위로는 한양 도읍을 둘러싸고 있었던 서울성곽이 이어진다.





# 이화장 정문 풍경


김승현 기자<okkdoll@naver.com>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