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 들녘에서

풍요로운 들녘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있는 들녘의 모습이 아름답다. 바닷가의 수평선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지평선을 바라보니 새롭다. 알알이 영글어가는 낟알들이 탐스럽다. 올해도 풍년이다. 넉넉해지니,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앞선다.

김제 만경 들판.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오천만 우리 민족 마음의 고향이다. 산업화로 인해 생활이 많이 달라졌지만, `농자천하지대본`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들판이 누런 황금빛으로 물들여지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이 참 많이 있지만, 풍년을 확인할 수 있는 들판의 모습이 그 중의 으뜸이란 사실을 실감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 말씀이 생각난다.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고 하였다. 그만큼 김제 평야는 역사 이래로 풍성한 곳이었다. 만경의 황금벌판을 바라보고 서 있으니, 그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쌀 수입으로 인해 농사를 짓는 분들의 어려움이 크다. 고통이 깊을수록 인생의 참 맛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견디기 힘든 아픔을 극복하면 아름다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만경 들판의 도로에는 코스모스들이 장관이다. 그런데 지평선 축제에 개화시기를 맞추기 위하여 그 꽃봉오리를 싹둑싹둑 자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행사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리에 어긋나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꽃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으로서 무리가 생기게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힘이 들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놓아두면 순리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일을 추진하려고 애쓰다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무리가 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쌓이게 되면 나중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사람들의 의도와는 달리 코스모스 꽃은 피어난다. 코스모스 사이로 영글어가고 있는 들판의 모습이 참 좋다. 낟알 속에는 농민들의 꿈이 배어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아! 얼마나 감동적인 풍광이란 말인가?



꿈은 희망이다. 인내할 수 있게 해주고 성숙하게 해준다. 기다릴 줄 알게 해줄 뿐만 아니라 희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동행을 통해 초심을 유지하게 해주는 근원이다. 비워내게 하기 위하여 버림을 실천할 수 있게 한다. 소통을 통해 아름다운 풍요를 완성하게 해준다. 황금색으로 바뀌고 있는 만경 들녘에서 느낀 소회다.

가을에 그리운 사람

확 트인 바다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멀리 심포항에는 배들의 모습도 보인다. 깊어지는 가을을 손으로 잡을 수 있다. 동종에서는 금방이라도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나올 것 같다. 드넓은 서해바다에 고운 울림으로 공명되어질 것 같다. 좋다. 바다가 보이는 산사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망해사. 바다를 바라보는 산사라는 의미를 가진 절이다. 절실한 마음으로 소원을 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전북 김제시 진봉면에 위치하고 있는 절은 크지 않아서 더욱 더 정감이 간다.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일상의 번거로움을 모두 내려놓고 가을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김제에는 높은 산이 없다. 망해사가 들어서 있는 곳도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할 정도의 높이다. 바다가 있음으로 해서 산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망해사에서 바라보는 서해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김으로서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다. 바닷바람은 변함없이 불어오고 있지만 주변 환경은 달라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산사 옆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해안 경계를 위해서다. 군부대가 사라짐으로 해서 주변의 모습도 완전히 달라졌다. 평화롭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 산사의 마당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그리운 사람을 떠올려 본다. 사랑하였던 님의 얼굴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세월 따라 숨을 쉬는 공간이 많이 달라져 있지만 마음만은 간절했다. 멀리 있어도 가슴으로는 가까운 사람. 공간적으로 다르고 시간적으로 비껴 서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부근에서 서성였다. 그것은 옹달샘이었다. 특히 가을에는 더욱 더 그리워진다. 맑은 샘물이 솟는 것처럼 신선한 향기가 온 몸을 휘감아 내린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살아가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사에서 가을에 흠뻑 젖었다. 그리움으로 서성거렸던 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삶의 향에 취하였다. 걸어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냉혹하다 하여도 충분히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가을 산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 세상은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특히 오늘과 같은 가을은….

하늘에 걸린 수세미

풍요롭다. 마치 하늘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초록의 이파리와 잘 어울린다. 맑은 공간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넉넉함이 내 마음에도 고스란히 배어든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흥겨워지고 즐거워진다. 정녕 가을이란 사실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수세미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곳은 전북 정읍시 산내면이다. 옥정호의 상류로 주변 산천이 오염되지 않아 청정하기만 하다. 맑은 공기와 밝은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매년 축제를 연다. 은은한 보라 빛이 배어나는 구절초 꽃이 만개하면 장관을 이룬다.



옛날부터 이곳은 구절초 꽃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칠보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 구절재다. 구절초가 피어 있는 고갯길이란 뜻이다. 인근에 구절초가 자생하고 있었는데, 축제를 시작하면서 이곳 옥정호 상류에 집중적으로 구절초를 재배하고 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꽃은 피지 않았지만, 꽃봉오리가 맺혀 있다.

대신 수세미가 가을의 풍성함을 대변하고 있다. 수세미 옆 처음 보는 열매도  특이함을 더한다. 반은 노랗고 반은 초록이다. 호박과도 비슷하다.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가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색깔의 오묘함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수세미에서 배어나는 풍요 속에서 조상들의 넉넉함을 생각해본다. 가을, 풍성한 수확을 거두면서도 이익만을 추구하진 않았다. 매정하게 모든 것을 다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땅 속에 살고 있는 벌레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은 남겨 놓는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새와 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다.

까치밥이 그것이고 도토리를 모두 다 수확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까치밥은 새들을 위한 배려였고 도토리는 다람쥐와 같은 짐승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수세미를 바라보면서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새삼 생각해본다. 이기심을 버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각박한 인심에 놀랄 때가 많다. 이기심이 앞서면 매정해지게 마련이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인간관계는 삭막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정이 사라지게 되면 사람 맛이 나지 않는다. 살 맛 또한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찌 사람답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향기 나는 삶이다.



주렁주렁 열린 수세미가 가을을 익혀가는 공간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풍성한 가을,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본다.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기심이 앞서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넉넉하게 살아가고 싶다.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어진다. <춘성(春城) 정기상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