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대표, 한․중 양식 결합







우리나라의 종 중 최고를 꼽으라면 ‘성덕대왕 신종’, ‘상원사 범종’ 그리고 ‘보신각 종’을 꼽을 수 있다.

서울 도성의 문을 여닫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데 사용했던 보신각종은 태조 때부터 종루에 걸렸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1398년(태조 7)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주조한 종을 청운교 서쪽 종루에 걸었다.

당시 백금 50냥을 섞어 만들었고 제작지인 광주부터 서울까지 운반하는 데에 군사 1,300여명을 동원, 10여일이나 걸렸음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이후 1413년(태종 13)에 종루를 통운교(종로 네거리)로 옮기고 1458년(세조 4)엔 새로 대종을 주조해 달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종로는 소실되고 종도 파괴됐다. 임진왜란 뒤인 1619년(광해군 11)에 종각을 다시 짓고 종을 걸었는데 이 때 내건 종이 명례동 고개에 있었던 보물 제2호 보신각 종이다.

보신각종은 원래 1468년(세조 14)에 주조돼 원각사에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절이 폐사되자 방치됐다. 1536년(중종 31)에 기안로의 주장에 따라 남대문에 옮겨 설치하려고 했으나 김안로의 죽음으로 걸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 됐다고 한다.

그 후 1597년(선조 30) 명나라 제독 양호가 현 명동성당 부근 명례동현으로 옮겼다가, 광해군 때 지금 종로의 보신각에 옮겨져 인정과 파루를 알렸다. 이 종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두 차례의 화재를 당해 원래 모양이나 음향에 손상을 입게 되자, 31절과 광복절, 그리고 제야의 타종용으로만 사용돼 왔다.

1979년부턴 종에 금이 가자 제야행사에만 타종되다가 결국 1985년에 보존책이 마련돼 제야행사용으로도 사용하지 않게 됐다.

보신각종은 음통이 없고, 2마리의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술부분까지 직선으로 돼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술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제작 연대와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명문이 있다.

몸통에 보살상 1구가 확인되는데 원래는 4보살이 교대로 배치됐으나 후대의 화재로 인해 나머지 3구는 마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기본적인 특징들은 우리나라 범종의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외래적인 요소가 많이 섞였다는 평가다. 특히 쌍용으로 고리를 만들고 띠장식을 가한 것들은 중국종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종의 전체적인 두께에서 입술부분이 두툼한 데에 비해 몸통부분으로 가며 점차 얇아지는 것은 조선종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보신각종에서 보이는 이런 한․중 양식의 결합은 고려 말 원나라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연복사 종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우리나라 조선 전기 대종을 대표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명문을 통해 이 종이 당시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대종으로 학술적 가치를 지니며 그 무게가 20여톤에 달해 성덕대왕 신종과도 비견될 수 있는 큰 종이라 할 수 있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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