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만원 보상금 받아서는 월세로 집 얻기도 힘들어. 죽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게 현재 심정이야."

서울의 한 뉴타운에서 거주하고 있는 70대 노부부의 하소연이다. 왕십리뉴타운 2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손모(71) 씨 부부는 조그만 구멍가게와 연탄배달을 하며 가게에 딸린 방 한 칸에서 생활해 왔다.



지난 5일 기자가 손 씨 집을 방문할 당시 부부는 식은 밥을 물에 끓여 김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손 씨는 "사람들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영업을 못한지 2년이 다 되다보니 끼니 해결도 쉽지 않다"며 "조합에서는 개별적으로 계속 비워달라고 재촉하고 있지만 보상이 제대로 안되면 올 겨울도 여기서 지내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손 씨가 거주하는 왕십리뉴타운 2구역은 곱창으로 유명한 가게들이 포함되어 있어 50여 가구 이상이 보상문제로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전농·답십리뉴타운 답십리16구역에 살았던 임모 씨는 그래도 손 씨보다 사정은 낫지만 처지는 비슷하다. 30대 후반의 임 씨는 답십리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 때문에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다.



임 씨는 "전셋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동시에 이주하다보니 구하기도 힘들고 집주인들이 월세를 선호하면서 자금 여유도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월세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며 "남편 월급으로 네식구 생활하기도 어려운데 매달 30만원의 고정지출이 생겨 고민"이라고 얘기했다.

서울 뉴타운 지역에 살던 서민들이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뉴타운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면서 전세 구하기가 힘들어져 다가구 등 서민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전셋값이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타운 등 재개발 내년 본격화 전세시장 불안 가속

정부나 서울시가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당분간 전세가격을 안정시키기는 역부족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근 부동산 정보업체들에 따르면 올해 4분기(10∼12월) 수도권에 입주 예정인 아파트(주상복합 포함)는 총 4만9175가구로 3분기(3만662가구)보다 많지만 경기도에 78.5%가 집중돼 있고 서울은 오히려 1~3분기보다 줄었다. 내년 서울 시내 아파트 입주물량도 2만6000가구로 올해 2만7000여 가구보다 소폭 감소할 전망이다.



여기에 뉴타운을 비롯한 재개발 사업이 내년부터 본격화하는 것도 전세시장을 불안하게 할 주요 원인이다. 재개발을 위해 기존 주택이 철거되면 해당 구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다른 살 집을 찾아 나서야 한다.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자문위원회에 따르면 재개발 사업 등으로 인한 멸실 가구는 지난해 1만8000여 가구에서 올해 3만1000여 가구, 내년 4만8000여 가구로 크게 늘어난다.

부동산 한 전문가는 "재개발·뉴타운에서 대규모 이주·철거가 진행되면 수천 가구가 인근 지역으로 전셋집을 찾아나서야 한다"며 "주변 전세가격 상승은 매매가격 상승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전세난을 부추긴 원인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꼽는 이번 전세난의 원인은 서울 강남권 일대 아파트 입주 물량이 지난해의 반토막이라는 점과 재개발·재건축으로 기존 주택이 계속 철거돼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을 이사철이란 계절적 수요와 맞물리면서 전세 품귀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해결책은 없다.
우선 이번 전세난의 진원지인 강남의 경우 공급물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8학군으로 불리는 강남 등으로 전세수요가 몰리고 있지만 물량은 거의 찾기 힘들어 전세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실제로 강남3구(서초구 송파구 강남구)의 하반기 공급물량은 약 3150가구로 지난 7월 입주한 서초구 반포동 반포레미안 2444가구를 제외하면 1000가구가 채 안된다. 연 단위로 보면 올해는 약 3600가구가 전부로 지난해 2만6000가구의 15% 수준이다.

강북 재개발 이주수요 대책 전무 전세가 상승 부추겨

강북 재개발·재건축 추진에 따른 이주수요 대책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 이는 서울 전세가 상승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잠실 주공재건축 아파트의 경우 작년 입주 당시에 비해 최근 전세가가 약 30% 오르면서 세입자들에 부담이 되고 있다.
특히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도 전세난을 부추기고 있는 원인이다.

전농·답십리뉴타운 답십리 16구역을 도로 하나를 경계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  씨는 "우리 가게 단골 중 이 동네로 이사한 가구의 절반 이상이 월세를 끼고 집을 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한꺼번에 이사하는 바람에 물량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은행금리가 낮아 여유있는 집 주인들이 월세를 선호한 것"이라고 밝혔다.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도 "전농7구역은 99% 이상 이사를 가 멸실상태이며 답십리16구역은 70% 이상이 이주했다"며 "면목동과 장안동 등지로 이사를 많이 갔으며 여윳돈이 없는 사람은 경기도 등 외곽으로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학교 등의 문제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못 간 사람들은 인근 지역 전세물건이 워낙 부족해 월세로 많이 이사했다"고 말했다.

왕십리뉴타운도 전농·답십리뉴타운과 사정은 비슷하다.
전업주부인 최모 씨는 남편의 직장이 동대문 근처라 신혼 초부터 왕십리뉴타운에서 열다섯 평 정도에 방이 두개인 집을 전세 4000만원 에 살았다.

뉴타운 지역은 강북 안에서도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지은 지 15년 이상 된 다가구 주택은 아파트나 신축 빌라 시세보다 저렴한 값에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 씨는 "지난해 같은 가격으로 이사를 가려고 길 건너 동네 전셋값을 알아보니 천정부지로 솟아 같은 크기의 집이 7000만원으로 거의 두배 가까이 올라 있었다"며 "주거이전비에다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합해 간신히 해결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또 "경기도 의정부나 포천 등지로 이사한 이웃들도 있다"며 "이들의 일터도 동대문이나 을지로가 대부분인데 출퇴근으로 소비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왕십리뉴타운과 인접한 상왕십리에서 중개업소를 운영 중인 정모 씨는 "지난해 기준으로 4인 가족에게 주거이전비가 1439만원이 지급됐다"며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이주를 하면서 이 지역도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적은 악순환으로 전세난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정 씨는 또 "왕십리뉴타운에서는 방3개의 다가구를 5000만원 정도에 거주할 수 있었지만 주변지역은 전세가격이 최소한 7000∼8000만원 선"이라며 "서울은 어는 곳이나 전세난이 심해 외곽으로 이사를 간 사람들도 많다"고 밝혔다.

전세시장 불안 양상 지속시 `인상 상한제` 불가피

이같이 서울지역 주택철거가 늘어나고 입주물량이 부족해지면서 불똥은 경기권으로 튀고 있다. 서울 전세가격 상승에 부담을 느낀 전세수요가 경기도로 옮겨가면서 수도권 가격까지 올리고 있다는 게 현지 중개업소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시장의 분석은 이와 다르다. 경기도로 이주해가는 기존 서울 세입자 수요가 많지 않을 것으로 보는데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 새 집을 산 집주인들이 대출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서울 전세 시장이 들썩이는 이유는 재개발과 재건축에 따른 이주수요가 가장 큰 원인"이라며 "단기적인 이주수요를 막는 등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동산 정보업체 부동산써브 관계자는 "실수요 위주인 전세시장은 단기간에 근본적인 처방이 어렵다"며 "당분간 전셋값은 수도권 위주로 상승세가 이어지겠지만 크게 오르지는 않다가 내년 봄 이사철에 다시 오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또 일부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이 제시한 `전세가 인상 상한제`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최근 집주인들이 전세가격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가격을 올리는 경향이 있다"며 "전세시장 불안 양상이 계속된다면 상한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강성철 기자 steel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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