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적상산의 가을

곱다. 물들여지는 단풍이 손짓한다. 파란 하늘의 흰구름과 어우러져 어서 오라 한다. 보고 싶은 마음이 붉은 색으로 승화된다.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하여 저리도 예쁘게 변하였나. 지난 여름의 뜨거운 열기와 비바람을 가슴에 담아 창조해낸 빛깔이다. 감내해야 하는 아픔이 컸기에 색깔 또한 저리도 우뚝해질 수 있는 거다.

적상산의 가을. 붉은 치마 산이란 의미다. 만산홍엽의 색깔이 붉은 치마처럼 진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덕유산국립공원의 한 구역으로서 양수발전소가 건설된 지역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여 오늘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준 유서 깊은 절 안국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북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한 산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깊어진 가을에 화사하게 단풍이 물든 적상산도 아름답지만, 초록의 여유가 살아 있는 초가을의 모습 또한 매력이 넘친다. 4계절의 특징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같은 가을이라도 그 매력이 모두 다 다르다.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 절정의 가을도 눈이 부시지만, 초록과 어우러져 있는 가을의 단풍도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초록과 어우러진 적상산의 가을 색깔에 취하면서 가정을 생각한다. 가정은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다. 가정에 사랑이 넘쳐야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가정에 사랑이 메말라 있다면 세상 또한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우선 되어야 한다.

사랑에도 차이가 있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다르다. 사랑의 속성은 같지만,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에는 색깔이 다르다. 초록과 어우러진 단풍과 붉은 색깔의 단풍에도 현저한 차이가 나듯,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도 스펙트럼이 다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조화를 이룰 때 사랑의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다.



초록과 분홍으로 곱게 물들여져 있는 적상산의 가을이 매혹적이다. 적상산의 고운 단풍처럼 가정에도 사랑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가정에 사랑이 충만 되어 사회가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저 단풍과 같은 사랑이 물들어졌으면 좋겠다.

가을 단풍은 소리 없이 물들여지고 있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시나브로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가정의 사랑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 소리 없는 배려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으로 번져났으면 좋겠다. 눈빛에서 눈빛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으면 좋겠다.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그득 넘쳐났으면 좋겠다. 적상산은 가을로 치닫고 있다.

구절초 향 그윽한 가을

코끝을 자극하는 향이 감미롭다. 향에 취하니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러나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시각적으로 느끼는 고혹적인 풍광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얀 색이 눈부시게 유혹하고 있는데, 어찌 그것을 몰라라 할 수 있단 말인가? 후각과 시각만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꽃이다.

구절초. 고갯길과 소나무 아래에 꽃이 만발했다. 전북 정주시 산내면은 온통 구절초 세상이다. 옥정호와 어우러져 화엄 세상을 이루고 있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을 별유천지라 하였던가?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세상에 들어서니, 나 또한 신선이 된 것 같다. 구절초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구절재를 따라 길 양옆에 피어 있고 산에는 온통 향기로 넘쳐나고 있다.



구절초는 넓은 잎 구절초, 구일초(九日草), 선모초(仙母草), 들국화, 고뽕(苦蓬)이라고도 부른다. 산야 어디라도 잘 자라는 야생화다. 높이 50cm 정도이고 땅속 줄기가 옆으로 뻗어나면서 자란다. 꽃의 색깔이 어찌나 선명한지 눈이 부시다. 하얀 색으로 빛나는 꽃도 있고 연분홍 색깔이 스치듯 물들은 꽃도 있다. 그 은은함이 마음을 잡는다.

구절초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편안해진다. 향에 취해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더 바랄 것이 없다. 구족한 세상이란 사실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 완벽함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의 모습에 감동하게 된다. 완전한 세상을 망치는 것은 내 안에서 끓고 있는 욕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욕심을 버리면 구족한 세상을 누릴 수 있다.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세상이 바로 완벽한 세상이다. 이미 세상은 갖추고 있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나아가서 마음까지 가리게 된다. 완전함에도 완전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니 불만이 앞선다. 불평이 커짐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은 바로 나 자신이다.



꽃이 웃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집은 바로 내 마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은 텅 비게 된다. 텅 빈 마음의 집이 바로 가장 좋은 집이다. 무욕의 넉넉한 마음은 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음으로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고 무엇이든지 수용할 수 있다.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마음을 비워내기 위해서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지혜는 깨어 있는 마음이다.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차리는 마음이고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사실을 알아차리는 마음이다. 항상 깨어 있다 보면 습관으로 굳어진다.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잘못된 습관은 나를 두렵게 만든다.



나이를 먹다보니 두려움이 많아진다. 열정이 넘치던 때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불안해진다. 활짝 피어 있는 구절초를 바라보면서 나를 본다.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이 어떠한지를 바라본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는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절감한다. 꽃처럼 환하게 살고 싶다. 구족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었으면 좋겠다. 향이 감미롭다.

가을 빛 담쟁이 덩굴

붉게 물들여진 이파리가 곱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가을은 담쟁이덩굴에서부터 온다. 다른 식물들의 이파리는 아직 초록 기운이 왕성할 때 담쟁이의 이파리는 빨갛게 물들어진다. 먼저 사랑하고 그리움도 더 많이 쌓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곱게 물들여진 담쟁이덩굴의 이파리를 바라보면서 그리운 얼굴을 떠올린다.

이곳은 전라북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무주다. 덕분에 가을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담쟁이덩굴의 색깔은 인상적이기만 하다. 가슴 깊은 곳에 침잠되어 있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빛깔을 지녔다. 그만큼 영롱하고 선명하게 물들여져 있다.



가을 빛깔과 행복. 곱게 물들여진 담쟁이덩굴의 이파리를 바라보면서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 일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가을 낭만에 푹 빠져든다. 이 고운 가을 빛깔에 취하여 감동하면 그만이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욕심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가을 빛깔 그 자체를 즐기고 누리면 되는 일이다.

행복이란 감정이다. 구체적이지도 않고 그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서일 뿐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내 스스로 창조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랑새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스스로 가꾸고 즐길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행복을 창조하는 힘이다.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재미다. 재미를 느끼고 재미있는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 재미는 결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창의력도 생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다. 창의적인 생활 속에서는 단조로움이 있을 수 없다. 하는 일마다 즐겁고 하는 일마다 신바람이 난다. 좋은 일이 줄줄이 이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쁜 일들의 연속이니, 자연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재미는 행복의 근원이다.



행복에 젖으면 만사형통이다. 고민거리도 모두 털어 버릴 수 있고 근심거리도 거리낌 없이 버릴 수 있다. 곱게 물든 담쟁이 덩굴을 보면서 가을 빛깔의 영롱함에 취하였다. 가을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다.<춘성<春城)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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