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역사 2 - 일제 시대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의 노력으로 정비가 됐던 청계천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 500년 동안 불리어 오던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 `청계천`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해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북촌과 남촌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鐘路)`와 `왜인들의 마을 혼마찌(본정, 명동 일대)`를 가르는 차별의 경계선이 됐다.

일본이 청계천을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한 것은 1918년경 부터인데 조선총독부를 비롯 조선 식민지배의 중추기관을 청계천 이북으로 이전하기 위한 사전 정비작업의 하나로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복개는 하천에 `ㅁ`형의 하수관을 만드는 것이어서 지천들은 물이 흐르는 실개천이 아니라 영락없는 하수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여러 차례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했다. 1만평 택지 조성, 고가철도 건설, 자동차 전용도로 건설 등 다양한 안이 마련됐다. 이런 구상들은 일제가 서울을 대륙의 병참기지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은 재정문제로 인해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일제의 청계천 정비로 인해 청계천에 있던 많은 다리들은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광통교 옆에 전차선이 놓이게 됐으며, 광통교 교대엔 지름 1m가 넘는 하수관이 묻히게 됐다. 오간수문은 1908년 완전히 헐렸고 대신 차로와 전차선로 겸용 다리가 놓여졌다. 하량교, 영도교 등 일부 다리는 근대식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됐고 관수교, 주교와 같은 근대식 다리가 새로 만들어졌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물자와 인력난을 겪게 됐고 청계천 준설을 비롯한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은 거의 방치 상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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