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 덮었다 40년만에 다시 연 '청계천'
뚜껑 덮었다 40년만에 다시 연 '청계천'
  • 승인 2009.11.1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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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역사 3 - 1950년대 이후







1930년대 이후 일본은 청계천 정비를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발표했으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청계천 등 서울의 도시정비사업도 모두 방치 수준으로 전락했다.

1945년 해방 무렵, 청계천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한 악취를 풍겼다. 1949년 광통교에서 영도교까지 청계천을 준설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역시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전쟁 이후 청계천변은 생계를 위해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로 더욱 북적거렸다. 이들은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을 짓고 생활했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됐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고 도시 전체 이미지도 크게 손상됐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빈민지역이었다. 당시 기초적인 생활필수품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정권은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는데 바로 하천을 덮는 `복개(覆蓋)`였다.

청계천은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엔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됐고 고가도로도 만들었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 착공돼 1971년 8월 15일 완공됐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하천은 아스팔트 도로로 변했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계천 인근에 살던 이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에 강제로 이주돼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청계천의 지난 50년 역사는 서울의 역사를 분명하게 농축하고 있다. 1950년대 말 쓰레기와 오수로 뒤덮인 불결과 빈곤의 상징은 60·70년대는 성공적인 산업화·근대화를 상징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엔 소음·혼잡·매연 등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며 서서히 논의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청계천이 다시 열리게 된 `복개(復開)` 사업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시절인 2003년부터 시작돼 2005년 10월 마무리됐다. 4000억원 가까운 자금이 투입된 엄청난 공사였다. 복원 사업 이후 청계천 유지비는 연간 70억원 가량이다.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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