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길고양이

이제 제법 쌀쌀하다. 가을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같다. 가을을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계절 내내 똑같은 모습일 것만 같은 벽돌이나 보도블럭도 겨울스러움을 품는다. 나무처럼 색을 바꾸고 잎을 떨구는 재주는 없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 날이 추워지면 그것들은 약간 푸석한 듯 하게 얼어붙은 색깔이 된다. 미묘한 차이. 오늘은 햇빛이 쨍쨍하지만 공기가 싸늘하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찬바람은 없더라도 얇은 옷을 걸치고 나왔다간 깜짝 놀라 집으로 다시 돌아가 스카프라도 한 겹 더 걸치고 나와야할 것 같다.

햇빛의 노오란 빛이 조금씩 채도를 바래가는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는 오전이다.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겨울날 같은 느낌.


슬리퍼를 질질 끌고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흐름은 느려도 차가운 공기에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목을 움츠리고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이렇게 햇볕이 따뜻한데도 이렇게 춥다니. 그런데 저 멀리쯤 노랗고 하얗고 얼룩덜룩한 한 덩어리가 보였다. 고양이었다. 그 복슬복슬한 것은 졸린 듯 눈을 반쯤 감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제 혼자 봄인가 보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잔뜩 움츠린 나는 놈을 보며 잠깐 가던 길을 멈췄다. 녀석은 잠시 긴장하는 듯 근육이 움찔거리더니 내 꼼지락대는 발가락들을 보며 힘을 풀었다. 별로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나 보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님의 시 中」

꽤나 좋아하는 시다. 봄은 고양이라고 노래하는 구절구절이 감상적이고 감각이 넘친다. 눈을 껌벅이는 녀석을 보면서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 봄은 고양이다. 내 앞에 있는 녀석, 무채색으로 차차 겨울화 되어 가는 배경에서 녀석은 혼자 봄의 채도를 가지고 있었다. 봄은 고양이고, 또 고양이는 봄이다. 어쩌면, 이장희 님이 이 시를 쓴 것이 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나처럼 그저 제 혼자서, 제 주변만 봄인 이 사랑스런 녀석들을 발견하신 걸지도.


밤이 되었다. 깜깜해진 밤은 확연히 겨울의 냄새가 난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희끄무레한 것이 저만치 있었다. 오전의 그 고양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전의 그 고양이인지 확신이 들진 않았으나, 그래도 그 체구와 무늬, 빛 발하는 노오란 눈알까지 녀석이 맞는 것 같았다. 녀석은 꼬리를 쳐들고 사뿐사뿐 걸어가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날 알아보는 걸까? 녀석의 긴장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마치 `아아 뭐야, 오전의 그 녀석이잖아` 라는 듯. 난 혼자서, `임마` 하며 알은 체를 했다. 무심하게 나를 쓱 보고는 제 하던 일을 계속한다. 우아하게 걸어가서 쓰레기 더미를 뒤진다. 알은 체를 한 뒤라 녀석이 쓰레기 뒤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입이 쓰다.


집에서 소시지를 좀 가져왔다. 녀석한테 줬더니 눈치를 본다. 자리를 비켜줬다. 멀찌감치 앉아서 고양이가 냠냠 소시지 조각을 먹어치우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법 예쁜 생물체 아닌가. 그 모습이 꽤 앙증맞아서 흐뭇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근처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양이는 움찔하며 근육을 긴장시킨다. 할아버지께서 한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셨다. 할아버지께서 고양이를 발견하시고는 미간을 찌푸리셨다.


"이놈의 괭이 새끼!"
고양이를 향해 발을 쾅 쾅 구르시고는 들고 계신 쓰레기봉투를 고양이를 향해 던졌다. 고양이야 워낙 재빠른 놈들이니 날 듯 사라져 버렸지만.


"에이! 고양이 새끼들 다 죽여 버려야지!! 쓰레기봉투란 쓰레기봉투는 다 찢어놓고…."

할아버지께서는 화난 언성으로 대문 안쪽으로 사라지셨다. 나와 먹다 만 햄 조각만 덩그러니 남았다.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그 해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들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해충`으로 분류된 것들이 그렇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그렇고,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동물도 그렇다. 고양이도 예외는 아니다. 고양이들은 쓰레기봉투를 찢어놓고 밤에 소름끼치는 소리로 울어대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든다. 옛날부터 요물로 취급받아왔던 고양이인지라 밑도 끝도 없이 `재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고양이들이 끼치는 해는, 고양이들이 받는 취급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난 고양이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들이 내는 아기울음소리도 싫지 않게 넘길 수 있다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쓰레기를 뒤지고 길거리를 더럽히는 것도 치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다만 그런 것들로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과연 정당화 될 수 있냐는 말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경계해야하는 일이다. 고양이들이 끼치는 해가 그들을 `다 죽여 버려야` 할 정도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굶주리고 쓰레기를 뒤져야하게 만든 건 그들의 터전을 빼앗은 사람들의 잘못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애완 고양이들이 주인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길고양이로 살아가야 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고양이가 아사하고 또 차바퀴에 죽어간다. 그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머리에 못이 박힌 고양이와 잔인하게 살해된 고양이도 발견되었다.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먹이를 주고 돌봐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생명도 존중해 주자. 고양이도 하나의 생명임을 망각하지는 말자. 비단, 길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앗아간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살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조금 양보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님의 시 中」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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