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은 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 때는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을 갑절로 체감하며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을 끌고 집으로 향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춰 넣는 손에서도 피로감이 뚝뚝 떨어졌다.

"철컥, 끼익-."

특유의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는 집이 괜히 씁쓸했다. 내 움직임에 반응해서 현관 쪽 센서등이 팟 하고 켜졌다. `탑승`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킬힐로부터 하루 종일 시달렸을 내 발들을 해방시켜줬다. 아찔하게 꺾여 있던 발이 평지에 닿을 때는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 발이 푹푹 꺼지는 느낌. 어쨌거나 그 느낌에 집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일종의 안도감으로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이 축축 늘어졌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으아∼."

씻고 화장도 지워야 잘 수 있을 텐데…. 엎어져서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씻고 잘 순 없지. 당장이라도 잠으로 다이빙 할 것만 같은 정신을 추스르며 반드시 씻고 자야 한다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렇지만 어쩐지 집에 오고 나서 더 피곤해진 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가 귀찮았다.

잠시 그렇게 누워있었더니 작은 집안을 노랗게 비추던 현관 센서등이 자동으로 꺼졌다. 온 방안이 까맣게 물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잠이 들 것만 같아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방에 불을 켰다.

일어난 김에 후딱 씻고 자면 될 것을 엄습해 오는 귀찮음에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속으로는 `아, 씻어야 하는데…`를 연신 중얼대면서. 방금 점등한 형광등이 새하얗게 빛을 발했다. 약간 어두컴컴했던 아까와는 달리 구석구석이 다 환했다. 그 밝음에 조금씩 놓았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화장대 쪽 어딘가를 초점 없이 응시하던 나는 읏차 소리를 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겨우겨우 씻으러 가나 했더니 바닥과 화장대 밑 좁은 공간의 작은 무언가가 다시 날 주저 앉혔다. 

"헛!"

골반 쪽으로부터 목 뒤까지 쫘르륵 소름이 돋았다. 왜 저런 게 우리 집에 있는 거지? 그것은 6개의 다리와 윤기 나는 관절과 마디, 길쭉하게 뻗어있는 더듬이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벌레와 거미 등에 공포심이 그다지 없는 나조차 대면하고 싶지 않은 족속들. 바로 바퀴벌레였다. 녀석의 어마어마한 크기에 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녀석이 비록 성인 남자 엄지손가락만 하긴 하나, 그나마 뒤집혀서 바둥대고 있음이 다행이었다.


"어떡하지? 아 진짜, 어쩌지?"


혼자서 중얼거리기만 할 뿐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이럴 땐 정말 혼자 자취하는 게 서러워 진다. 일단 저 녀석을 저대로 둘 순 없으니 죽이거나 뭔 수를 써야 할 텐데 용기가 나질 않았다.


찬장에서 입구가 큰 유리병 하나를 꺼내 이를 악물고 바퀴벌레 위로 덮었다. 일단 이 녀석을 감금해 두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A4용지를 병 밑으로 슥슥 밀어 넣어서 입구를 대충 봉하고 병을 샥 돌려서 빠르게 뚜껑을 닫았다.


녀석을 발견하고 나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떡하지`를 다섯 자루는 외친 것 같다.
 
우리 집은 이렇게 커다란 놈이 먹고 살만한 곳이 아닌데, 도대체 어디로 들어왔지? 밀폐된 유리병 안에서 달그락 대는 놈을 구석에 치우고 그 늦은 밤에 대청소를 감행했다. 혹시 나도 모르는 동거생물체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런 룸메이트는 이쪽에서도 사절이다.





씽크대 구석구석과 침대 밑, 화장대 밑, 옷장 밑 할 것 없이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내 눈에만 안 띄는 건지 더 이상의 바퀴벌레는 없었다.

우리 집엔 집개미가 있다. 개미가 있으면 바퀴벌레가 없다기에 바퀴보단 개미가 낫지 하며 개미박멸을 포기했던 나였는데, 공존할 수도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시계는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때까지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대청소를 한 나는, 어디에서도 환영하지 못할 룸메이트들이 발견되지 않았음에 애써 안도하며 샤워를 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밤새 서랍을 열 때나 냉장고를 열 때마다 바퀴벌레가 후두둑 떨어지는 악몽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믿었던 개미들에게도 배신당한 느낌이고 또 언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짠하고 튀어나와 식은땀에 흠뻑 젖게 만들지 모를 바퀴벌레에 대한 불안으로 바퀴약과 개미약을 한 박스 주문했다.

밀폐된 유리병 속에 누워있는 녀석은 아직도 살아서 다리로 유리병 벽을 달각달각 두드리고 있었다. 유리병 속에 있어서인지 녀석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전히 흉측하고 끔찍한 생김이긴 했지만, 뭐랄까 날 밤새 두려움에 떨게 만들만큼 무시무시한 괴물감은 못 된다는 거다. 어젯밤부터 공포에 떨던 나는, 놈을 빤히 관찰하면서 오히려 그 공포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래봤자 벌레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좀 많이 더러울 뿐.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바퀴벌레를 직접 눈으로 본적이 크게 없는 것 같다. 그저 주위에서 바퀴벌레에 대해 묘사하는 `무시무시한, 죽여도 죽지도 않는 생물체` 따위의 말들만 주워들었을 뿐. 그래서인지 유난히 바퀴벌레만을 무서워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가위에 한 번도 눌려 본 적 없던 어릴 적의 내가 가위에 눌릴까 무서워 밤잠을 설치던 것처럼. 막상 가위를 경험해 보고는 별것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었다.

뭐든 무지는 공포를 가져오는 것 같다. 무서워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직시하고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그 공포를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포의 실체는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퀴벌레가 더 이상 무섭지는 않을 것 같다. 아, 아무리 무섭지는 않다고 해도 룸메이트로서는 사절이다. 주문한 바퀴벌레 약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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