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위봉사에서

마음이 울적하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무엇하나 즐겁게 해주는 것이 없다. 병은 끊임없이 육체와 정신을 괴롭히고, 살아가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거기다 비까지 내리니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하다.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할텐데…. 결국 집을 나선다.


겨울을 재촉하는 듯 비는 쉬지 않고 내린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끈질기게 내린다. 지쳐서 쉬었다가 내리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먼 길을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인근에 있는 산사를 찾기로 한다. 도심을 지나는데, 자동차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비오는 일요일이 여유롭다.



위봉사.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산사다.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는 도량으로서 정갈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위봉사는 봉황이 사는 보금자리라는 뜻이다. 산사를 둘러싼 산들의 모습에서 봉황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안온하게 안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문천왕 등 네 분의 천왕이 눈을 부릅뜬 채 사천왕문을 지키고 있다. 신성한 산사를 더욱 성스럽게 지켜내고 있는 4대 천왕의 정성을 되새긴다. 그 모습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으니 난감하다.



돌로 된 계단을 오르며 많은 생각을 떠올린다. 많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비로소 너른 절 마당에 들어설 수 있다. 오르다 보니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하심으로 겸양의 태도를 가져야 부처님의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봉서루를 지나 또다른 계단을 올라 보광명전 앞마당에 서면, 이곳이 우주의 중심이란 사실을 실감한다. 마당 한 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는 소나무의 위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소나무만으로는 2%가 부족하다. 그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무 아래에 세월이 내려앉은 깨진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완벽한 조화다.



석탑에는 많은 것들이 배어 있다. 세월의 무게는 말할 것도 없고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도 담겨 있다. 석탑을 향해 합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이 배어 있다. 석탑에 깃들어 있는 숱한 바람을 하나하나 가늠해본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이기심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기심을 배제한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뜻이다. 거기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철저하게 욕심을 버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욕심을 더 큰 서원으로 바꾸는 것이다.
 
욕심을 버린다? 말은 쉽지만 실제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말로는 할 수 있어도 실천하기는 어렵고 힘들다.



약수터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는 데도 쉴 사이 없이 물이 쏟아지고 있다. 목마른 이가 어느 때라도 목을 축일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다. 물을 받아 마실 수 있는 바가지를 마련해두었다. 바가지는 욕심을 서원으로 바꾸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작은 힘이라도 기꺼이 내놓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서원이다. 욕심을 더 큰 서원으로 바꾸기 위해선 마음을 닦아야 한다.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요사와, 보물 제60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보광명전의 단아한 모습에서 나를 찾는다. 처마에 걸려 있는 다양한 현판의 글씨를 보며 걸어온 날들을 반추해본다. 후회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이의 내일은 밝다.



돌아보건데 나의 지난날은 부끄러운 일들뿐, 때문에 모두가 후회스럽기만 하다. 잘 하였다고 생각되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난감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니 내세울 것이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이기심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욕심을 채우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욕심의 대상인 나란 도대체 무엇일까? 비 내리는 산사, 의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절대 반복될 수는 없다. 한 번뿐이라는 절실함이 앞서기 때문에 더욱 더 행복해지기를 그렇게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구하는 행복은 독립적이고 주관적인 행복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유하고자 하는 행복은 대부분 비교에 근거한다. 그러니 더욱 더 상대적이 되고 더욱 몸부림치게 만든다. 비교하며 추구하기 때문에 행복은 점점 더 멀어진다. 대신 그 자리에는 고난과 아픔이 난무한다.
 


밀물 되어 밀려드는 고통 앞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헐떡이며 살아왔다. 행복이 주관적인 만족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른 채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니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결국 고통을 추구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비 내리는 산사에서 마음을 본다. 마음이 있긴 한 것일까?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보광명전 앞마당을 걸으며 생각하였다. 무아, 이론적으론 이해하지만, 그 실제에 대해서는 의문이 앞서니 당혹스럽기만 하다. 내가 없다면 욕심이란 결국 바람과 같은 것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터인데….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더 많아진 시점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 자신의 우매함이 싫다. 무아라는 진리를 얻었다면 자유롭게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마음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헤매고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내가 없다는 진리를 온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비구니 스님들이 마음을 닦는 산사에선 비구니 스님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 닦기에 정진하시느라 보이지 않는가 보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속인에게는 이 것 또한 욕심이란 생각이다. 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점을 항상 잊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산사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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