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민족 정신의 상징, 3·1 운동의 태동지" - 천도교 중앙대교당
"일제시대 민족 정신의 상징, 3·1 운동의 태동지"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승인 2009.12.2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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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역사 현장 탐방 14 - 근대종교문화유산 1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지난해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호부턴 근대에 건축된 종교문화유산을 다뤄봅니다. 종교계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과 국내 건축물 양식 변화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첫 순서로 `동학` 사상에서 시작된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그 인근을 돌아봤습니다.



* 독립운동가이자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 주도 

  `어린이 운동` 발생지·월간 `개벽` 등 신사상 선도


일제 시대와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며 격랑을 헤쳐나가야 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종교계는 때로 종교 이상의 사회적 역할을 해 왔다. 천도교와 불교, 기독교와 유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항일 운동을 펼쳤고 군사정권 시절엔 저항운동과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 자리매김했다.

전통 깊은 불교 사찰과 유교의 서원은 전국 각지에 두루 퍼져 있었지만 근대 시기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서구 기독교의 핵심 근거지들은 모두 서울 중심부에 밀집해 있었다. 종로를 시작으로 명동까지 이르는 길을 걷다 보면 거의 모든 교단의 뿌리들과 만날 수 있다.

일제 시대 서울의 3대 건축물을 꼽으다면 조선총독부 건물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그리고 명동성당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사이로 거대한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 건물들은 한성 전역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위용을 자랑했었다.

민족 성금으로 건립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근대종교문화유산을 돌아보는 첫 출발지로 삼기에 제격이다. 197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됐다.

서구 종교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던 구한말, 모두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한민족의 전통 사상과 유불선(儒佛仙) 교리, 여기에 기독교의 박애정신까지 더해지며 `동학 사상`이라는 특수한 종교가 태동했고 이는 천도교로 계승·발전했다.

붉은 벽돌이 주를 이루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지하철 안국역과 종로3가역에서 5분∼10분 정도 걸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중앙대교당의 역사는 독립운동가로도 유명한 3대 교주 손병희를 떼놓고선 얘기하기 힘들다.

1897년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교단의 근대화를 위해 1905년 동학이라는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다. 1918년엔 교단 의결을 받아 현 위치에 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전국의 교인들에게 성금을 모금해 진행했다.

당시 손병희를 비롯 천도교 지도자들은 이 성금의 상당 부분을 3·1 운동을 위해 썼고 그 일부 만으로 현재의 교당을 지었다고 한다. 때문에 1919년 예정됐던 완공은 연기될 수 밖에 없었고 여기에 일제의 집요한 방해까지 이뤄지면서 1921년 2월 말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 독립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민족 성금으로 지었다는 데 의미가 적지 않다.

분리된 구조 `독일식`

건물은 중앙 탑부와 긴 강당,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독일인 안톤 페러가 설계에 참여한 만큼 독일식 건축 양식이 많이 가미됐는데 이처럼 분리된 구조는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보기 드물다고 한다.

건물 정면은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중앙에 높은 탑과 2개의 원형 돌출물, 그리고 양쪽 날개 건물이 있다. 중앙 진입부 현관은 모두 화강석인데 반원형 아치형을 통과하면 대교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주재료는 붉은 벽돌이며 기단 부분엔 육중한 화강석을 썼고 지붕은 구리와 함석을 사용했다. 전체 길이 38m, 폭 22m, 높이 30m로 바닥 면적은 약 300평이다.

교당 안으로 들어가면 오래된 학교의 강당에 들어온 것처럼 푸근한 느낌을 준다. 서구식 성당이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장이나 벽면이 화려하지도 않다. 중간에 일체의 기둥도 없이 설계된 게 특징이다. 당시 이처럼 넓은 공간에 기둥 없이 지붕을 덮은 것은 상당히 높은 건축방식이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운현궁`

강단 좌우에 2개의 준비실이 있으며 그 앞으론 의자들이 가지런히 배치돼 있다.

1층에서 계단으로 2층에 오르면 사무실이 있고 중앙에 위치한 사무실 한편으로 원형 철제 계단이 있어 3층과 옥탑으로 갈 수 있게 돼 있다.

중앙대교당은 건축 이후 천도교의 중앙 의식이 열리는 곳이었지만 각종 정치집회와 예술 공연, 강연회 등도 활발하게 개최됐다.

대교당에서 나와 수운회관 앞 정문쪽에 이르면 이 곳이 갖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들과 만날 수 있다.

<개벽사>는 천도교가 정신 개벽과 사회 개조를 위해 1920년 6월부터 월간지 개벽을 발간했던 곳이다. 신문화 운동의 요람이었던 이 곳에서 계급주의적 성향의 김기진 박영희와 민족주의적 성향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등이 활동했다. 개벽은 1926년까지 발간됐다.

손병희의 사위였던 방정환은 여기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였던 색동회와 어린이라는 호칭을 일반화시킨 잡지 <어린이>를 만들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개벽사터> 표지판 왼쪽엔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조형물이 방문객을 기다린다. 뒤쪽으론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방정환 선생이 마치 100년 후를 내다본 듯한 느낌이다.

정문 오른쪽엔 `독립 선언문 배부터` 표지석이 있다. 1919년 3·1운동 거사를 위해 천도교 대표 등 민족 지도자들이 이 곳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하고 배부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세웠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2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5명은 모두 천도교인이었다.

당시 천도교 교세는 300만명에 달할 정도로 막강했으며 사회적 영향력 또한 대단했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 강도 또한 컸다.

김구 선생은 훗날 귀국 후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종로2가 YMCA(기독청년회관) 앞 `3·1독립운동 기념터`는 3·1운동을 준비했던 곳이고 보신각 앞은 3·1 운동의 중심지였다. 중앙대교당을 시작으로 세 곳을 돌아보는 것은 짧은 코스지만 항일 정신을 되새기기에 충분하다.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

중앙대교당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길목엔 `서북학회`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 조직한 애국계몽단체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1910년 강제 해산됐다.

그 후 서북학회 터엔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건국대학교 전신인 정치대학이 들어섰다. 경운동 인근이 항일운동과 교육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길을 건너 천도교 중앙대교당 맞은편엔 사적 제257호 운현궁이 고풍스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조선 26대 왕인 고종도 등극하기 전 이 곳에서 잠시 지냈다. 대원군은 이 곳에서 어린 아들을 대신해 10여년간 정치를 했다. 서운관이 있던 고개에서 이름을 따 운현궁이란 이름을 붙였다.

대원군이 국정을 논하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별당인 이로당으로 구성됐다. 대원군의 위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규모와 격식, 평면 모양이 사대부집 보단 궁궐 내부 건물에 가깝다. 대원군 별세 후 손자까지 상속됐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집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





19세기 말 정치의 중심지였던 운현궁 근처에 천도교가 근거지를 틀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당시 교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석영·한양의원 `의료 중심지`

운현궁에서 종로 쪽으로 내려오면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1894년(고종 31년) 이 곳에 문을 연 관립교동소학교는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1895년(고종 32년)엔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돼 한성사범부속소학교로 지정됐다. 그 후 한일합방(1910년)으로 교동국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88년까지만 해도 3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교동초등학교 아래쪽엔 지석영 선생이 살던 집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낙원동 17번지에 있던 기와집은 우리나라에서 종두법을 최초로 실시했고 관립경성의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지석영 선생(1855-1935)의 보금자리였다. 지석영 선생의 묘소는 길 건너에서 활동했던 방정환 선생(1899-1931)과 함께 망우리 공원에 있다.






지석영 선생이 살던 집에서 종로 3가쪽으로 가는 골목은 한양의원이 있던 곳이다. 한양의원은 근대 초창기의 양의로 한성의사회 회장과 조선의사협회 간사장을 지낸 박계양이 운영하던 병원이었다. 홍명희, 정인보, 최남선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고 한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인근은 20세기 전반 정치와 종교, 그리고 근대 교육과 의료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서 항일운동의 불씨가 불붙었고 신사상과 어린이 문화가 싹튼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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