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석의 사진으로 보는 세상>

모젤 항에서 갈매기 날아가는 간판을 발견하고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날지 못하는 새들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담으면 뭔가(?)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상 그러하듯이 돌아와서 사진을 보면 그 때의 감동이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감동과 실망의 순환이 한편으로는 사진 찍기를 다그치는 동력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기도 합니다.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면 세상을 사진으로 보는 못된(?) 버릇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이미지 노예로 전락되는 초기 단계입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 그 자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장면 순간순간에서 사진 요소를 찾아내고 슬며시 미소를 짓는가 하면,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반드시 챙기고 나서야만 마음이 놓이고, 차를 몰고 가다가도 사진에 담고 싶은 아름다운 풍광이 나타나면 위험을 무릅쓰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촬영하고, 더 나아가 어떤 이는 꿈에서도 촬영을 한다는, 그런 중증의 증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증세를 가리켜 어느 사진 평론가는 ‘육안의 순수성을 잃고 카메라라고 하는 기계의 눈에 종속되는 이미지의 노예, 사진의 노예가 되는, 그래서 사진가를 종종 <이미지 사냥꾼> 혹은 <이미지 포획자>’라며, 세상을 오로지 카메라의 눈으로만 보려는 이미지 채집자로 전락한 초짜 사진가들을 야무지게 꼬집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없어서 <결정적 순간(주)>을 놓쳤다며 애석해 하지도 않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카메라 앵글에 관심두기 보다는 그 내용에 몰입할 수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 드디어 보이는 것을 그저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닌, 보이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런 단계에 이르면 사진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남은 인생 내내 사진을 찍어도 과연 그런 경지에 발끝이라도 내밀 수 있을지, 도저히 가망 없어 보입니다. 피사체를 마음으로 내적 소통할 수 있는 그 때를 소망해 봅니다.

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빛과 구도와 감정이 일치된 순간>이다. <놓친 고기가 더 크다>는 식으로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고홍석님은 전북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포토아카데미(http://cafe.daum.net/photoac)를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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