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두 개의 이야기

이야기 하나: 눈

“서걱 서걱 서걱~.”

간밤에 눈이 내렸다. 하나 둘 떨어지던 눈꽃송이를 뒤로하고 잠이 들었는데, 이른 아침 무언가 서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일곱 시. 방학도 했겠다 일곱 시는 기상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예의 그 서걱거리는 소리가 살뜰하게도 꿈속으로 빠져드는 내 발목을 잡았다.

정체불명의 소리 때문에 다시 잠 들 수 없었던 나는 반의반쯤 상체를 일으켜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집 안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잘 떠지지도 않는 거의 감다시피 한 눈을 찌푸리며 집안을 둘러보다가 그 소리가 굳게 닫힌 창문 너머 골목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님 손으로 더듬더듬 버튼만 누르면 금세 입을 닫는 알람시계처럼 내가 어떻게 없앨 수 있는 소리가 아니란 뜻이다.

간신히 상반신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팔에 힘을 빼자 몸이 풀썩 넘어갔다. 아침의 이불은 잠들 때 보다 훨씬 더 포근한 것 같다. 저 소리의 정체가 뭘까, 하고 생각하며 눈꺼풀이 감겨옴을 느꼈다.

아, 아마 간밤에 온 눈이 많이 쌓였나 보다. 집 앞의 눈을 치우신다고 아침 잠 없으신 집주인 아저씨가 아마 비질이라도 하고 계신 모양이다. 나름의 추리로 의문을 해결하곤 나는 다시 잠에 빠졌다.

얼마나 더 잤을까, 창 밖에서는 서걱거리는 소리 대신 아이들이 무어라 저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창밖에는 예상대로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신난 아이들이 와아 몰려갔다가 몰려온다. 그걸 멍 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한기에 몸을 으스스 떨며 서둘러 창을 닫았다. 이제 불투명한 창유리와 흰 커튼, 두 겹으로 가려져 내 눈앞에 그 모양을 숨겼지만 밖의 하얀 풍경은 그 잔상을 남기며 쉬이 흩어지지 않았다.

지붕이며 담이며 전선 위까지 소복하니 쌓인 그 하얀 것들은 보기에 차다기 보단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줬다. 아침부터 열심히 쓸어 주신 덕에 거뭇하니 나타난 아스팔트 바닥과 그 옆으로 쌓인 눈 무더기. 눈이 오면 별 것 아닌 골목길도 참 고와진다. 마치 설빔을 해 입은 것 같다. 아이들이 그야말로 애들답게 눈 장난을 치느라 빨개진 손이며 코며 귀며, 그네들 입에서 나오는 뽀얀 입김도 모두 천진난만하다.



어쨌거나 그건 그거고, 나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샤워를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나 체크를 하다가 과외를 하러 가는 날임을 깨닫는다.

‘아 짜증나. 오늘 눈 왔는데….’

비나 눈이나, 그냥 보고 있는 건 예쁘고 좋다. 질척질척 대며 걸어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절로 한쪽 눈이 찌푸려진다. 집을 나설 두어 시간 후에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아래 흰 눈들은 더 이상 희지도, 검지도 않은 추한 몰골을 하게 될 것이다. 다만 목적지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방해하고 신발에 그 자욱을 남길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오늘 같은 날에 하이힐을 신었다간 엉덩이가 축축해지기 십상이다. 스웨이드 재질의 신발은 꿈도 못 꾼다. 그 추적추적한 회색 물을 신발에 염색시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그 뿐인가, 지하철역이며 계단이며 뽀송뽀송한 곳은 한군데도 없이 검고 더러운 구정물이 발 닿는 곳마다 가득할 것이다. 그 더러운 발자국들은 자신들의 희고 고왔던 과거는 까맣게 잊은 채 사람들의 신발과 바닥과의 마찰을 줄이는 데에만 힘을 쏟을 터였다.

차로 출퇴근하시는 분들은 눈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어제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도로 상태의 악화로 운전을 포기하시는 분들 덕에 내 마음도 편치 않다. 지하철이 만원일 테니까. 이러니 내가 눈을 안 찌푸릴 수 있겠냔 말이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야속하게도 시간은 흘러 집을 나서야만 할 시간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역시나 눈이 사람들의 발자국 속에 탁한 색으로 녹아 질척거리고 있었다. 날씨도 쌀쌀했다. 겨드랑이에 손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서넛의 꼬마아이들이 길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아니 뛰다시피 했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아이들의 발걸음에 반쯤 녹은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폴짝거리는 그 조그만 발들은 그 첨벙거리는 놀이가 재미있는지 옷에 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이리저리 뛰어 놀았다. 그러다가 흰 눈 무더기로 다가가서 눈을 뭉치며 놀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것 같은 남자아이가 ‘이것 봐라’ 하며 눈 무더기에 자신의 손바닥 도장을 찍었다. 어린 아이들이 너도나도 따라했는데, 가장 작은 아이가 손이 시린지 손에 묻은 눈을 화들짝 털어내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깔깔 웃었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아이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도 피식 웃었다.

아이들은 집에 가서 엄마에게 옷에 뭘 이렇게 튀겨왔냐며 꾸지람을 들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신나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 어릴 적에도 눈이 오면 등굣길이 즐거웠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발 밑에서 뽀드득거리는 것도 뒤돌아 내 발자국을 확인하는 것도 손이 빨갛게 되도록 눈을 뭉치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찾아 내 발자국이나 내 이름을 자랑스레 새기는 것도 모두 재미있었다. 눈이 온 날 아침이면 거실 베란다 큰 창틀에 얼굴을 들이대고 설레임에 눈을 반짝이던 나 아니었던가. 그런 날은 항상 일찍 집을 나서도 지각을 했었다.

출근길 걱정을 하던 엄마와 아빠의 말이 전혀 공감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간밤 내린 눈에 눈살이 찌푸려지니 나도 이젠 좀 컸나보다. 흰 눈 같던 어렸던 동심이 이젠 흙발에 녹아 검어져 버린 것 같아 씁쓸했다. 길가의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며 걸어본다. 뽀드득 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조금은 즐거운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 둘: 카르페디엄

요 근래 너무 유쾌하다. 딱히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이나 여건이 변한 건 아니다. 그냥 한참을 고민해왔던 것들이 더 이상 고민거리로 보이지 않고, 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대체 무슨 작용으로 이렇게나 바뀐 건지 내 스스로도 어리둥절하다. 점점 우울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는 판단 하에 뇌에서 도파민이라도 잔뜩 풀어놓았나, 하고 생각했다.(도파민: 동기부여, 보상과 적응, 활력 등의 정신기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쾌감을 제어한다.)

최근 일부 과학자들이 사랑 역시 두뇌활동으로,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감정일 뿐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 사람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웃음이 쏟아지는 것도, 심장이 뛰는 것도, 좋았다가도 금세 짜증이 샘솟는 변덕스러움도, 상대방에게 헌신하고 싶은 마음도, 점점 식어가는 마음조차도 호르몬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호르몬들과 그 작용을 논리적으로 들고 있는 이 과학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자면 ‘과연 그런 것 같다’며 머리를 주억거리게 된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 기분이 단지 호르몬의 화학작용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씁쓸해진다.

철학자들 중에는 육체는 단지 그릇일 뿐, 그 안에 담긴 영혼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다. 이러한 사상은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고도 필연적인 전개구조를 가지기에 용이하다.



사후세계나 윤회, 귀신 등은 별론으로 친대도 인간이 세포덩어리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슘, 인, 칼리움, 유황, 나트리움, 염소, 마그네슘, 철, 옥소, 망간, 동, 아연, 규소, 비소, 불소, 취소, 닉켈, 코발트, 알미늄, 세폐움, 붕소, 스토론티움, 바나디움…. 이런 인간을 구성하는 원소들을 완벽하게 조합한대도 그 결과물이 과연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뇌사상태를 ‘살아있다’고 보기 힘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소설 중에 모든 육신을 버리고 ‘뇌’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비록 모든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만 스스로의 온전한 사유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 아니 한 ‘뇌’의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 비상식적인 참신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완벽한 단절 속에서 오히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이 부정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뇌’가 포기한 삶이 무가치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섬뜩한 이야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르나르의 단편 소설중 하나라는 것은 내 생각의 확고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 충격이 내 생각을 바꿀 순 없었다. 설령 나 혼자만의 단절된 내부가 완벽한 사유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외부와 호흡하는 삶만이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감정이 가슴에서 비롯된 것이든,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후자라면 꽤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언가에 자극 받아 미래를 결심하고… 그런 것들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기 때문에 호르몬에 의한 단순 화학 작용일지라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난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혼이라는 것이 미디어 등에서 묘사되어지는 반짝이는 기체 같은 것이나 귀신같은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저 뇌의 화학 작용이 인간 비밀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종종 하곤 한다.

그렇지만 난 그런 가능성까지 몽땅 다 포함하여 전부를 ‘영혼’이라고 부르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뇌=영혼’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귀신이 영혼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소소한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차피 어느 쪽이라도 그것은 ‘영혼’인데.

요즘의 유쾌한 기분이 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 도파민의 과다 분비라는 이름의 영혼의 발작인건가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뭘 해도 다 즐겁고 용기가 충만한 기분이다. 밑도 끝도 모르고 우울의 늪에 침식해 가는 것보다 훨씬 좋은 현상인 것 같다. 긍정적인 기분이 계속 상승작용을 하여 점점 더 즐거워지는 것 같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내 영혼의 명암이 두 세 톤 정도 밝아졌으리라. 너무 천방지축으로 날뛰지는 말고 가만히 이 기분을 껴안고 있다가 가끔 너무 가라앉을 때 꺼내서 한 입씩 야금야금 뜯어먹어야겠다. 황송하리만큼 행복한 나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영혼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ㅋㅋㅋㅋㅋㅋ.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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