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 기자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 북한산 둘레길

모처럼 찾은 산행 길은 기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최근 개인적인 일로 한동안 산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완연한 봄을 알리고 있다. 올해는 때늦게 4월에 내린 눈이 농가의 작물피해를 불러오고 사상 초유의 프로야구 게임이 중단되는 등 기상악화의 영향으로 여러 곳에서 피해가 속출하기도 했다. 허나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 ‘도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로 길이 생긴다’는 뜻이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겨울이 아무리 생떼를 쓰면서 버텨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봄 앞에 무슨 재주와 염치로 길을 터주지 않을 방도가 있겠는가.(아직도 무거운 화두를 짊어지고 등산이라니…쯧쯧쯧)


#4.19국립묘지

오후에 동대문 인근에서 지인과 점심을 같이 한 후, 지난해 완료한 북한산 둘레길의 순례길 일부(통일연수원~솔밭공원 3.4㎞)를 둘러보기로 했다. 오전 시간에 워밍업 삼아 탕춘대를 가볍게 타고 약속장소로 갈 생각이다.

불광역에서 구기터널 방면으로 가다 우측 장미동산으로 접어들었다. 날씨가 포근하니 마음마저 편안하다. 평일의 봄 산행은 고요함과 적막감이 동시에 혼재하는, 이것저것 생각나게 하는 넉넉함이 배어있어 좋다.

장미동산의 출발점도 어느 들머리와 마찬가지로 깔딱고개로 시작된다. 10여 분 땀을 빼면 팔각정이 나온다. 보통 여기서 목도 축이고 과일도 꺼내 먹곤 한다. 능선 저편에 눈에 익은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나월봉 나한봉 문수봉 대남문 보현봉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 있다. 북한산이 명산임을 보여주는 첫 번째 조망대다. 가까이 탕춘대의 아지랑이는 만춘(晩春)이 두려운 듯, 필사적인 몸놀림으로 스쳐가는 나그네를 유혹한다.

흔히들 탕춘대 길을 ‘실버코스’라 칭한다. 나이 연로하신 분들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도 산은 산인지라 전혀 힘이 안들 수는 없다. 성곽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봄을 상징하는 진달래와 개나리, 벚꽃이 만발해 있다. 상큼한 꽃들을 보니 봄은 음악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란 말이 실감난다. 요즘 주변에서 각종 음악제가 열리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한 시간여를 걸어오니 구기동 이북오도청 가는 갈래길이 나온다. 이곳으로 방향을 틀어 하산한다. 지난 산행 때 잠시 언급한, 동래산성 막걸리를 맛 볼 수 있는 ‘장독대’란 선술집을 지나는데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패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다. 또 옛날 생각나게 시리….

1927년생인 패티 페이지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출신으로 50∼60년대 팝계에서 왈츠의 여왕으로 자리 잡은 미모의 가수였다. 그녀의 처녀 히트곡인 ‘테네시 왈츠’는 1950년 12월부터 연속 9주간 빌보드 차트에 톱으로 랭크되었으며, ‘체인징 파트너’와 함께 패티 페이지의 대표적인 노래로 불린다.

황산성 변호사 사무실과 이북오도청을 지나 구기동 구기터널 입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신설동에 내려 선배 일행과 합류한다.



자주 애용하는 숭인동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사회 골목에 있는 ‘고향집’이다. 갈치조림과 오징어볶음을 시켜 점심식사와 함께 걸쭉하게 막걸리 한 사발 쭉∼욱 들이 키니 진시황제가 부럽지 않다. 이 집 주인아주머니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만큼이나 음식 맛도 맛깔스럽다. 아마 서울시내 음식점들 통틀어 ‘맛 자랑’ 경연대회를 펼쳐도 뒤지지 않을 솜씨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두릅 돌미나리 도라지 취나물 달래 냉이 등 각종 봄나물이 제철을 만나 연신 입안에서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이 집의 또 다른 별미는 가마솥 숭늉. 펄펄 끓는 가마솥 안에 구수한 누룽지가 곰국 다려지듯 진국을 뿜어내고 있다. 무한리필이라 밥보다 숭늉에 수저가 먼저 간다. 열무김치와 보리밥을 섞어 만든 고추장비빔밥과 더불어 이집의 간판 별미다. 이렇게 양껏 먹고 다시 산에 오를 수나 있을까. 술자리 2차는 들어봤어도 등산 2차는 조금 생소하긴 한데.

식사 후 104번 버스를 타고 4.19국립묘지를 지나 하차한 다음, 주택가인 진달래길 골목에 들어서니 ‘둘레길’을 안내하는 푯말이 곳곳에 붙어있다. 어느 집에서 내다 놓은 군자란이 꽃망울을 피우고 상큼한 향을 내뿜는다.

걷기여행은 자연 속에서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마음을 비울 수 있어 좋다.



관리공단 측은 “지난해 완료한 순례길 3.4㎞(통일연수원~솔밭공원)에 이어, 올해 6월까지 순례길 우측 솔밭공원~우이령 2.2㎞ 구간과 순례길 좌측 통일교육원~솔샘터널 4.0㎞ 구간을 연결하는 6.2㎞의 사업을 마무리 짓고 총 9.6㎞의 둘레길 조성사업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한다.

국립공원 북한산 둘레길(64㎞)은 순례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2010년부터 순차적으로 공사를 진행해 완공되는 대로 개통하는 것을 원칙으로 2013년까지 전 구간 공사를 끝낼 예정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북한산사무소 수유분소에서 출발하여 보광사를 거쳐 우이동 솔밭공원까지 3.4㎞에 이르는 순례길은 시범구간으로 ‘이 구간은 이름 그대로 순례의 길’이다.



이곳 순례길에는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을사조약의 무효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순국한 이준 열사 등 독립유공자 묘소 14기와 조국광복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광복군 17위의 합동 묘까지 모두 30여 기의 묘소가 나뉘어 모셔져 있다. 이준열사 묘역입구에는 열사의 공적을 새긴 ‘이준 열사 위훈비’가 세워져 있다. 위훈비 우측으로 순례길 방향표시가 되어 있고 좌측은 이준 열사 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이준 열사 묘역은 이곳에서 숲길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야 한다.

얼마를 가니 4.19혁명 때 조국 민주화를 위해 젊음을 산화한 ‘국립4.19민주묘지’가 눈 아래 펼쳐진다. 1960년 4·19혁명 때의 희생 영령 199위를 모신 묘지이다.



관리공단의 북한산 둘레길 개요를 살펴보면, 구간별 구분 기준은 6㎞ 내외로 3시간 기본산행 코스를 반영했고, 행정구역과 주요 진입로 등 지리적 위치도 고려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자연탐방로와 연결되는 구간이 5개 노선 13.4㎞, 산림휴양 7개 노선 19.2㎞, 역사문화 5개 노선 9.4㎞, 경관조망 6개 노선 11.3㎞, 전원레저 2개 노선 3.2㎞, 마을활성화 3개 노선 6.6㎞ 등이다. 순례길은 최대한 자연 그대로를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구간별 주제노선은, 1구간(우이령길∼수유분소)은 순례와 소나무가 키워드며, 2구간(수유분소∼정릉탐방안내소)은 사찰문화와 북한산 생태를, 3구간(정릉탐방안내소∼형제봉공원지킴터)은 곤충과 새소리가 들리는 조용한 사색의 길로, 4구간(형제봉공원지킴터∼용화1공원지킴터)은 형제봉 능선과 북악산, 인왕산 등과 서울성곽 경관조망이 가능하고, 5구간(용화1공원지킴터∼삼천탐방지원센터)은 진관 자연문화와 은평 언저리, 선림전원 고향길 등을, 6구간(삼천탐방지원센터∼사기막공원지킴터)은 효자비와 무속신앙이 서린 곳으로 북한산성 경관도 동시에 스친다. 7구간(사기막공원지킴터∼오봉탐방지원센터)은 송추산 넘어가는 길로 산림식생과 야생조류에 대한 안내판이 들어 설 예정이며, 8구간(오봉탐방지원센터∼안골)은 송추마을과 사패산을 넘으면서 경관을 즐긴다. 9구간(안골∼다락원)은 고구려 석축과 사패산 보루유적을 감상할 수 있는 구간이다. 10구간(다락원∼무수골)은 도봉산 먹자골목과 도봉천의 생태를 눈앞에서 볼 수 있고, 마지막으로 11구간(무수골∼우이동)은 방학동의 역사와 생태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길이다.

이와 같이 북한산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 완주할 경우 5∼6일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순례길을 둘러본 일행은 김도연 선생의 묘소 근처에 있는 ‘인수제’(주인 김영복. 010-6487-8840)를 찾았다. 이승만 박사가 썼다는 ‘仁壽濟’란 휘호가 지금도 선명히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막걸리는 장안의 으뜸가는 황제막걸리로 유명하다. 주인장의 연로하신 모친께서 직접 빚어내는데, 옛날 시골의 밀주인 동동주 바로 그 맛이다. 인수제 막걸리를 먹어 본 사람은 고향 떠난 사람들이 느끼는 향수병 같은 그리움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인수재 간판


직접 만든 손두부가 3000원, 갈매기살 6000원, 토요일과 일요일만 맛 볼 수 있는 특미인 해장국과 내장탕이 각각 5000원씩이다. ‘백견이불여일식’이다. 백번 눈으로 보느니 한번 맛을 보면 알 것이다. 아름드리나무들을 옆에 끼고 손가락으로 술잔 휘저어 꺼억 붓는 대포 한잔. 갈매기살 뒤질세라 따라 들어온다.

하산주는 미아삼거리 부근의 활어센터에서 마무리한다. 봄 도다리와 줄돔 해삼 멍게 개불 등 평소 즐겨먹는 횟감을 곁들여 회포를 푼다. 창 밖 가로등의 반짝이는 불 빛 속에 하루해가 저물어 간다. 선임기자 jkh414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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