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대, 노란 어리연 꽃이 마음을 잡고 놓아주질 않네∼
사선대, 노란 어리연 꽃이 마음을 잡고 놓아주질 않네∼
  • 승인 2010.07.0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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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사선대와 노거수 그리고 들판

신선과 선녀들 노닐던 사선대에서

앙증맞다. 노란 꽃이 손짓한다. 한두 송이가 아니다. 이파리 사이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 채 부른다. 이 좋은 계절에 어울려 놀아보자고 한다. 내리쬐는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노란 꽃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수련 꽃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마음이 쏠린다.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다가 정신을 집중하면 눈 안으로 쏙 들어온다. 신비하다.

신선들이 혹한 이유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신선이 어떤 존재인가? 우주의 만물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도인들이 아닌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우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도교의 도인을 신선이라 부른다. 그런 신선들의 마음을 유혹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풍광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세상 이치를 꿰뚫고 있는 도인이 마음을 잡아버릴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사선대. 글자 그대로 네 명의 신선들이 선녀들과 함께 즐겁게 노닐던 곳이란 뜻이다. 전북 임실군 관촌면 오원천가에 위치한 유원지다. 오원천이란 까마귀 오자에 고을 원자를 쓴다. 까마귀들이 여유를 즐기면서 마음껏 노는 강이란 뜻이다. 그러나 전설에서와 달리 까마귀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다. 세월이 그만큼 많이 흐른 탓이리라. 무심한 세월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초로와 같다는 생각을 절감하게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렵고도 힘들게 살아온 인생이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가는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터뜨리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돌아보니 아니다. 정말 아니다. 왜 가는 시간을 좀 더 즐기지 못하였는지, 후회막급이다.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이란 사실을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



사선대에 전해지는 전설이 그 것을 반증한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우리는 쉽게 2000년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인생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세월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이산의 두 신선이 우연히 지나다가 오원천의 풍광에 매료되었다. 어찌나 주변의 모습이 아름다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눌러앉아 즐기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발견한 신선들이 또 있었다. 인근 운수산의 두 신선이었다. 이들도 심심하던 차였다. 다른 두 신선을 본 지도 오래되어 달려갔다. 네 신선은 기뻐하며 함께 하기로 하였다. 신선의 마음을 꽉 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였다. 시간 가는 것도 잊고 빠져 있었다. 이에 합세한 이가 또 있었다. 바로 까마귀 떼들이었다. 신선 주변에서 신선들의 흥을 맞춰 함께 춤추며 즐겼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오원천이다.

네 신선이 까마귀들과 어울려 세월 흘러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즐기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으면 하늘에까지 전해졌을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선녀들의 마음이 흥으로 넘쳐나게 되었다. 흥에 겨워 참을 수 없게 된 네 선녀가 신선들이 놀고 있는 이곳에 내려왔다. 네 신선과 네 선녀 그리고 까마귀들이 어울려서 신바람을 일으키며 즐기고 있으니, 당연 주변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신선과 선녀들이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니,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잡념을 털어버리기 위하여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 수가 많아짐으로 인해 이곳은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명성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더욱 더 높아졌다. 이제는 매년 축제를 열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있다.

이곳에 오면 삶의 스트레스를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한 순간에도 수없이 일어났다가 사그라지는 것이 바로 잡념이다. 이로 인해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은 이루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잡념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사람은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에 기인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나락의 수렁에서 헤매게 된다.



잡념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곧바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잡념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잡념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 것은 병이 된다. 그러나 잡념의 실체를 바르게 인식하고 정확하게 진단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약이 된다. 사선대의 어리연을 바라보면서 노란 꽃이 왜 마음을 잡아버리는지 그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선대에는 국제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인근의 오궁리 미술촌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 국제적인 조각가들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다양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예술의 아름다움에 푹 젖어들게 된다.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를 바라보게 됨으로서 절대적인 미의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성숙해 가는 것이란 말이 있다. 조각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뭔가를 얻고 성취해내기 위하여 발버둥 쳤기 때문에 삶의 고통이 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삶의 목적을 뭔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으로 잡았다면 그렇게 아픈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사선대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호수를 내려다본다. 호수에는 노란 어리연 꽃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실잠자리들이 보이고 수면 위를 날렵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소금쟁이도 볼 수 있다. 생명들의 아름다운 몸짓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목적을 새삼 생각한다. 성숙해져서 함께 나누며 공유할 수 있는 삶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일 것이다.

신선과 선녀들이 놀았다는 사선대에서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어서 좋았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개척하고 생존하면서 유지해가야 한다. 그 것도 한번뿐인 유한한 인생이다. 그렇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 눈치 볼 이유가 없다.



내 인생이 활짝 피어난 어리연 꽃처럼 우뚝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겸손을 생활화하여 한번 뿐인 내 인생을 빛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공유하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신선과 선녀들의 마음을 잡을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노란 어리연 꽃이 마음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노거수와 너른 들판의 공유

“저 나무는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을까?” 언뜻 보아도 서너 아름은 되어 보이는 노거수의 밑동이 믿음직스럽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서 있었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맑은 날에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웃고 웃으면서 살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나무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니, 나무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워진다. 경외감이 생긴다.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은 논이다. 모내기를 끝낸 논들의 모습이 산뜻하다. 초록의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싱그럽다. 물감이라도 묻어날 것 같은 느낌이다. 세진에 오염된 몸과 마음이 어린 모의 산뜻함으로 정화되어진다. 싱그러운 기운이 온 몸으로 전해지니, 날아갈 것만 같다. 참 좋다. 수채화 그림 앞에 서서 느끼는 감정이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털어버린다.

당산나무 아래에서 모내기를 마친 논을 본다. 가슴이 트인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나무의 가지뿐이다. 그러나 그 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파리 사이로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사방 어디를 바라보아도 확 트여 있어 좋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린다.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당산나무는 믿음을 주고, 초록으로 빛나고 있는 모들은 빛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들판이 좋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열려 있어서 좋다. 거침새가 없다. 막힌 곳이 없다.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수용한다. 무엇이나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차별이 없다. 나쁜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열린 마음이어서 좋다.



들판은 포용하고 융합한다. 바람도 햇살도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비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천둥과 번개도 마찬가지다. 그 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포용한다. 수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재창조한다. 새롭게 융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가을이 되면 풍요로움으로 넘쳐난다. 쉬지 않고 일한다. 겉으로는 보이기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치열한 생명력의 현장이다.

들판은 우주를 채우는 빛이다. 언뜻 보기에는 역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생산량으로 우주를 그득 채운다. 들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 된다. 생산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이고 생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까지 넉넉하게 나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이런 들판의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공유다. 공유는 나눔보다 더 훨씬 효율적이다. 나눔은 분배하면 소진된다. 그러나 공유는 소진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여도 소진되지 않는다. 이는 소비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판은 생산적이다. 순환하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움을 생산해낸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여도 소진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더 아름답다.

500년 이상을 살아온 당산나무는 믿음직스럽고 그 아래에서 바라보는 들판은 넉넉하다. 공유하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넉넉해진다. 유한한 삶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다보면 모든 것이 다 그림자다. 허상일 뿐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들판처럼 살아가고 싶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 하나라도 더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춘성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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