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잡동사니 농법, 그 환상의 몽유도원에서

오래 전에 후배 한 사람이 대학교수를 목표로 박사과정을 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지도교수에게 금가루 바른 굴비를 수시로 갖다 바쳐야 하는 등의 굴욕적인 관행을 묵묵히 감내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더 이상은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농사에도 이미 고착된 관행이 있어서 그가 새롭게 끼어들 공간은 거의 없었다.

농약과 제초제 때문에 작물들이 각각의 특성과 내성을 잃어 버렸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나치게 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사회 부적응자가 되듯이 식물들도 다양한 종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가시적인 생산량은 증가할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품격은 떨어지기 마련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꽃속에서 익어가는 간장과 된장

주변에서는 그의 이러한 생각을 크게 비웃었다. 주변의 비웃음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그를 정신병자 취급한다는 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들과 말다툼을 벌이던 끝에 그는 결국 집을 나와서 절간에 들어가 계를 받고 중이 되었다.

“보통은 2,3년 정도 행자생활을 거쳐야지만 계를 받을 수 있다는데 저는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6개월여 만에 계를 주시더라고요. 계를 받고 나니 글쎄 이게, 살아도 괜찮다는 면허증을 받은 것 같더라고요.”


#도라지와 돼지감자의 어울림

그는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부모 형제들이 지적한 것처럼 정말로 정신병자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는 자살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절간에서 6개월여의 행자를 거쳐 계를 받고 스님 소리를 듣게 되면서부터 그 모든 의문과 갈등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중노릇이란 운전 면허증을 받듯이 삶의 면허증을 받은 것이 되는 셈이었다.


#딸기 옆에서 자라는 코스모스

그 후배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 많았다. 인문학적으로는 어떤 배울 것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농사에서는 곰곰 새겨볼 만한 게 있었다. 그의 생각을 풀어서 간략하게 해석을 하자면 이런 이야기가 되었다. 사람의 사회가 각양각색의 성씨와 인종, 성별, 연령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식물도 적당량의 잡초와 섞여서 자라는 게 자연의 이치에 옳다는 것이었다.


#매화나무에선 매실이 열리고..

후배의 그러한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우리집 텃밭은 아주 어지럽게 되었다. 어지럽다는 것은 물론 내 생각은 아니고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의 표현이다. 전체 면적 508평 가운데 집터 빼고 연못 빼고 마당이며 주차장을 제하고 나면 400평이 채 못 되는데 이 자리에 적어도 100여 종류의 나무와 약초와 꽃들 그리고 채소들이 자라고 있으니 어지럽다고 채머리를 흔들 만도 했다.


#배나무에선 배가..


그러나 새벽에 찻잔을 들고 그 많은 식물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닐 때 얻어지는 희열의 깊이를 손님들은 아직 모른다. 겨울 한철 3개월을 제하고 일 년 내내 꽃들이 피어 있는 비밀에 대해서도 손님들은 아직 모른다. 어쨌든 나는 여기에 잡동사니 농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보다 근사하고 우아한 이름을 찾기로 하자면 아마 경관농업이라는 명칭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학원농장의 보리밭

그런데 고창에는 이미 경관농업 특구라는 곳이 있었다. ‘따라쟁이’는 하지 않겠다는 게 그동안 고수해온 개똥철학인 까닭에 경관농업은 그만 포기해야 했다. 포기하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동사니 농법에 비해 경관농업은 뭐랄까, 어쩐지 격에 맞지 않는 부르주와 같은 냄새가 풍긴다는 느낌이어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요즘은 잡동사니 농법이라는 용어에 크나큰 자부심(?)마저 갖게 되었다.

마당에 식물을 심어놓고 가꾼다 해서 식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식물이 있는 곳에는 동물도 있기 마련이다. 두꺼비도 있고 개구리도 있고 뱀도 있으며 뻐꾸기에 동박새 등 각종 새들이 있고 겨울에는 꿩도 날아들고 고라니며 족제비들도 수시로 출현한다. 그만큼 그들의 다양한 식성을 채워주는 다양한 식물이 있다는 얘기이다.


#복숭아나무는 복숭아를...

그러니 이 잡동사니 농법은 일종의 잡학사전 격이다. 국어사전이라 해도 괜찮다. 이를테면 법학사전이나 경제학사전이나 종교사전 같은 특정 분야만을 제한적으로 다루는 사전이 아니라 이 지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명을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경관농업 특구에는 이런 것이 없다. 전혀 없다. 청보리축제라 해서 온통 보리만 있을 뿐이다. 경관농업 특구는 전두환씨의 부름을 받고 국무총리를 지낸 진의종씨가 60년대 어느 해에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하고 선거운동을 다니다가 낙선한 뒤에 사 들인 땅이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진의종씨 본인이 한 말에 따르면 선거운동을 다니던 중에 그 땅을 발견하고 ‘아 여기 참 좋다’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선이 확정된 뒤에 그 땅의 매입에 나섰다는 것이다.


#부엌바라지 앞에서도 꽃은...


오래 전에 진의종씨의 그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그때 우리나라 정치의 품질이랄까 품격이랄까 그런 것을 한순간에 배웠다는 느낌이었다. 진실로 민중의 미래와 오늘을 염려하는 정치인이었다면, 개인적인 가문의 영광이나 출세가 아닌 나라의 운명과 복락을 생각하고 고민해서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었다면, 여러 가지 공약들이 일회성의 선거용 립서비스가 아닌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그런 말이었다면 선거운동을 다니면서 땅을 보고 선거 끝난 뒤에 그것을 개인의 재산으로 매입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 땅을 어떻게 운용하면 지역민들에게 유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주워온 의자와 항아리

물론 우리의 정치 풍토에서 그런 큰 정치인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고창의 청보리축제가 경관농업 특구로 지정될 당시 진의종씨의 사위 이헌제씨가 주무장관이었다. 게다가 그 부인 명의의 땅이 경관농업 특구의 일정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옛말에 청렴한 선비는 오얏나무 밑을 지날 때 갓끈이 풀어져도 고쳐 매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헌제씨는 이러한 교훈을 따르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도덕성에 자부심이 있었거나 도덕 같은 건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 추론을 해도 별 무리는 없으리라.

진의종씨의 호는 백민인데, 진의종씨 본인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백민의 뜻은 백두이고, 백두란 민중과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며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살아온 내력을 살펴보면 어디에서도 민중은 발견되지 않는다. 1943년 일제하에서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고 훗카이도 농무과장으로 공직을 시작한 그는 해방 뒤에 상공부의 여러 과장과 국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보사부장관에 이르렀다.

국회의원도 네 번을 했는데 공화당 간판으로는 당선되지 못했다. 세 번을 내리 낙선한 뒤에 신민당으로 옷을 갈아입고 비로소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곧 박정희의 사람으로 들어갔고, 전두환씨가 광주에서 학살을 일으킨 뒤에는 국보위를 거쳐 민정당 전국구의원을 했고, 전라도 민심 무마 차원에서 총리기용을 제안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두환씨의 손발이 되어갔다. 이러한 그의 이력을 낱낱이 살펴본 어느 현대사 전공의 역사학도는 학회 홈페이지 후일담 게시판에 이런 말을 남겨놓고 있었다.

“일생의 직업들이 일관성이 없고 너무 다양하게 바뀌어서 한 가지로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조금 자세하게 캐봤더니 결국은 음, 음, 기회주의로 분류함에 하등의 망설임이 없다 하겠군.”

세간의 이런 평가와는 무관하게 백민기념관을 품고 있는 경관농업 특구의 청보리축제는 고창을 대표하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드넓은 벌판에 잡초도 거의 없이 보리가 바람에 물결치는 장면은 일률적이고 획일적이어서 흡사 7,80년대의 군사 퍼레이드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백민기념관은 물론 진의종씨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기념관 주변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입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석탑이며 불상 등 문화재급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호암미술관을 축소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보리밭을 찾는 관광객들은 당연히 보리밭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지만 백민기념관에 들러 진의종씨의 업적을 가슴에 담아가기도 한다.

그 많은 관광객들에게 온갖 나무와 꽃들과 풀들이 어우러진 잡동사니 농법을 소개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면서 혼자 히죽히죽 웃어보기도 하는 게 이즈음 내 생활이고 보면, 후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잡동사니 농법은 여러 모로 내게 유익인 셈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