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엄마와 시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암기과목에 특히 약했다. 맥락 없이 암기만 하는 것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내게 사회 과목은 특히 큰 골칫거리였다. 다른 친구들을 보면 그냥 통째로 외워버리던데, 난 그럴 수가 없으니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암기가 되곤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였나, 사회시험 범위가 세계사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때 같이 앉았던 짝과 얼마나 쿵짝이 잘 맞는지, 그 학기의 수업시간은 내내 수업은 뒷전이고 둘이서 소곤소곤 떠들어댔었다.

유난히 자애로우셨던 사회선생님의 시간에는, 마치 수업시간이 쉬는 시간의 연장 같았다. 우리 둘은 제일 뒷자리에서 교과서를 장벽삼아 키들키들 웃고 떠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문제아다. 죗값을 치를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우리가 대화의 장을 펴고 있을 새 진도는 꽤 많이 나가서 시험범위가 어마어마했다. 수업시간에 뭘 배웠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 그 범위가 오죽 많아 보였으랴.

설상가상, 내일 해야지 내일 해야지 미루다 보니 당장 이번 주말이 끝나면 사회시험을 보게 생겼지 않은가. 비상이었다. 나의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 짝꿍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둘은 성적도 비슷했었기에, 그녀는 나와 아픔마저 함께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반응은 내 예상을 처참하게 깨부쉈다.

“아…사회? 그거 일요일도 있잖아. 난 오늘 반 정도 외웠어. 뭐 이렇게 많아. 너 국어는 다했어?”

그런거 아무런 문제도 아니잖아? 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난 혼자서 말 못할 배신감을 느꼈다. 하늘도 무심하셔라 같이 놀았는데 왜 나에게만 죗값을 내리시나요.

교과서만 보고 세계사가 잘 이해될 리 만무했다. 상식도 없고 수업도 듣지 않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어느덧 일요일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조급해지는 마음에 어떡해 어떡해, 우는 소리를 했더니 엄마가 빠꼼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왜 그래?”

수업시간에 놀아서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어서, 그 말은 쏙 빼고 엄마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게 도무지 외워지지가 않는다고, 이번 시험은 망했다고, 어떡하냐고. 엄마는 내 성적에 그렇게 집착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공부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내일 딴 것도 보잖아 그거부터 봐.”

엄마의 말에 수긍하고 다른 과목부터 보기로 했다.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보시던 엄마는 “근데 뭐가 그렇게 안 외워지는지 어디 한번 보자” 하셨다. 내가 교과서를 건넸더니 어머니는 노트는 없냐고 물어오셨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없다고 대답한다. 엄마가 의미심장하게 흐흥, 웃으시며 흘겨보셨다. 책도 깨끗한 것이 노트도 없다면….

“너 사실 수업 안 들었지?”

이제 발뺌 할 수도 없다. 순순히 시인하고 나니, 엄마가 뭐 문제집이나 내용 요약되어 있는 건 없냐고 물어보시기에 사회 문제집을 꺼내 드렸다. 시험범위가 어디냐 하시기에 알려드렸다. 문제집도 이번 시험범위는 화끈하게 깨끗하다. 서랍에서 뭔가 주섬주섬 챙기시더니 문제집을 들고 거실로 나가셨다. 난 머리를 갸웃 했지만, 당장 내일이 시험이니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바로 요렇게^^

잠시 후, 엄마가 다시 들어오셔서 문제집을 건네주셨다. 빨리 영어 보고 이거 봐, 하시며 꽁, 땅콩을 한 대 선물하시고 나가셨다. 문제집을 펴보았더니, 거기엔 종잇조각이 잔뜩 붙어있었다. 중요 단어에 작게 자른 포스트잇을 붙여 놓으신 거다.

빈칸에 들어갈 단어가 뭔지 고민한 뒤 그 위에 단어를 적고, 포스트잇을 떼어가며 정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리 손으로 써도 다 튕겨나갔던 단어들이 조금씩조금씩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시험범위를 한번 다 보고 엄마한테 뛰어갔다.

“엄마는 천재에요!”

“알아^^.”

“그러니까 한번만 더 해줘요.”

“뭐? 이거 정말 귀찮아.”

이런 패턴이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난 결국 사회에서 고득점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까지 부려먹어 놓고 100점 못 맞으면 혼난다는 엄마의 엄포가 아주 쬐끔 무섭긴 했지만, 이런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너무너무 행복했었다.

지옥같은 시험기간이다. 이번 시험범위는 너무 많아 머리를 끙끙 싸매고 있었다. 이틀째 밤을 새다시피 한 터라 머리가 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 오후에 칠 교양과목은 정말,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래서 난 엄마가 전수해 준 비장의 무기를 쓰기로 했다. 물론 엄마처럼 꼼꼼하게 포스트잇을 잘라 붙이는 건 너무 힘이 드니까 그냥 수정테이프로 빈칸을 만드는 거다. 이걸 지켜본 한 친구는 내 이 비장의 무기를 ‘구멍내기’라고 명명했다.


#엄마 흉내내기 일명 `구멍내기`

교양 핸드아웃에 ‘구멍내기’를 하면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엄마가 더 보고 싶다. 혼자 사는 자취생은 너무 서러워. 이번 시험이 끝나 방학이 되면 당장 엄마에게 달려가야겠다. 아주 당연한 듯 내 뒤에서 날 지탱해주는 나의 어머니.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되어서 난 가끔 그 사실도 잊는 것 같다. 항상, 이 감사함을 망각하지 말고 살도록 해야겠다.

“잉잉 엄마, 너무 보고 싶어요!”란 내 문자에, “나도~ 내 딸아 ㅋㅋ”라고 답장해 주시는 귀여운 울 엄마. 사랑해요∼.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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