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양귀비회 설립과 해체에 관한 짧은 보고서

어느새 4년이 넘었다. 양귀비를 만난 지도. 그 해의 6월 말의 어느 날 묘령의 여인들로부터 유혹을 받고 길을 나섰다.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했다.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간단한 말 속에 많은 말이 들어 있었다. 한 여인은 남편이 뒤늦게 철부지 사춘기를 겪게 된 것인지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출가를 해 버렸고, 또 한 여인은 카드빚에 시달리다가 전략상 이혼을 했는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서 정말로 이혼을 해야 할 처지에 몰렸고, 또 다른 한 여인은 오래 전부터 남편이 등산을 핑계로 집을 나섰다 하면 열흘이요 스무날이라, 속이 끓다 못해 그만 다 타버릴 지경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역할이란 그리 썩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것이기는 했다. 그녀들의 이런 타령 저런 타령 온갖 타령을 묵묵히 충실하게 다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상황에서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울분을 토해야 할 상황에서는 같이 울분을 토해야 하는, 술을 마시라 하면 거절하지 않고 마셔주고 노래를 부르라 하면 노래도 가끔 불러주는 그런 역할이란 사실 고역이기는 하지만,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정의감 그리고 비분강개 같은 것들이 포개지면서 마치 마약에라도 취한 듯이 제법 푹 빠져들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부안 채석강이었다. 곰소를 지나 모항, 격포, 채석강에서 유턴하는 아주 기본적인 코스였다. 고창 해리에서 부안 해안도로까지는 이덕화의 별장이 아스라이 보일 정도로 지척이지만, 자동차가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일이라 선운사 옆으로 해서 흥덕을 거쳐 곰소로 그렇게 빙 돌아야 하는 까닭에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해도 세 시간씩이나 걸려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런저런 이유가 많았던 까닭에 세 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격포에 도착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다 보니 목이 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야 했고, 자꾸 물을 마시다 보니 차례로 한 번씩은 소변을 보러 간다고 차를 세워야 했으며, 곰소를 지나 내소사 입구 어딘가 감자 밭에서 감자 캐는 것을 발견한 한 여인이 “아 참 어제 감자 산다면서 잊어버렸네”하고 중얼거린 것을 계기로 너도나도 감자를 산다고 나서는 바람에 시간이 쓱쓱 잘도 가버렸다. 극한 상황에서도 집안 살림을 놓지 않고 챙기는 여인들의 눈물겨운 성실함의 기원이야 무엇이든 내게 주어진 역할은 그렇게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격포에 도착해서 차를 버리고 바닷바람이 거센 절벽 근처로 나서면서부터 여인들은 아무런 슬플 것도 화날 것도 없다는 듯 연신 까르르까르르 웃어대고 있었고, 가끔은 여자들만의 언어로 소곤소곤 수군수군 하다가 느닷없이 배를 움켜잡고 웃어대는데 그 분위기는 뭐랄까, 남자는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너 혼자 적당히 알아서 놀아라 하는 뭐 그런 것이어서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었다. 야 이거 내 꼴이 뭐냐 이거, 어쩌고 속으로 꿍얼대며 그녀들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는 내 눈에 문득 낯선 꽃 몇 송이가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양귀비였다.

꽃양귀비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도 보는 순간 대번에 그것이 양귀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부안군에서 아마 공지마다 조경용으로 꽃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철이 지나 꽃은 다 지고 몇 송이 안 남아 있었다. 목책이 둘러져 있었고, 군데군데 들어가지 마시라는 안내문도 매달려 있었지만 극심한 소외감으로 입이 한 발이나 나와 있었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목책을 넘어 들어가서 꽃씨를 받고 있었다.



씨앗 중에 작은 것을 담배씨라고 하는데 양귀비는 그보다도 작은 것 같았다. 거의 먼지 수준의 양귀비 씨앗을 집에 갖고 와서 편지봉투 속에 고이 모셔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씨를 뿌리고 싹이 나서 마침내 꽃들이 화들짝 피어날 즈음 세 여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꽃잔치를 해야 하니까 열일을 제치고 급히 달려와야 한다고 초청이 아니라 요구를 했다. 굳이 나이를 따지기로 하자면 내가 제일 막내였지만 나이를 따질 게제가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일 년 동안 내내 화가 나 있었다. 이 아줌마들이 젊은 남자를 데리고 가서 그게 뭐냐, 자기들끼리만 키득거리고, 뭐 그런 것이었다.

어쨌든 세 여인 모두 거절하지 않고 와 주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주었다. 어머나 이게 뭐야, 천국이네, 세상에, 이런 장관이 있었네, 어쩌고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는 그녀들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개회 선언을 했다.

“지금부터 양귀비회 결성을 선언하노라. 회장은 당연직으로 내가 맡는다. 회원 당신들께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오늘 관람한 양귀비에 관한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기한은 다음 달 오늘까지, 이상.”



이런 개떡 같은 창립 선언문에 배를 잡고 뒤집어지지 않을 사람이 누구 있을까마는, 고맙게도 회장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어깃장을 놓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이 잘 따라 주었다. 그리하여 한 달 뒤에 정말로 장문의 리포트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당나라 현종의 애인 양귀비에 관한 이야기는 한 편도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흔해빠진 이야기로 대충 꿰맞춘 게 아니라 각자 나름의 창의적인 공부를 해온 조금 과장을 하자면 보석 같은 글들이었다. 그것을 한데 섞어서 풀어놓자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양귀비는 특이한 식물이다. 가을에 싹을 내서 겉잎을 모두 갖춘 채로 월동을 하고 여름이 시작되면 꽃을 피운다. 봄에 씨앗을 뿌려도 꽃은 같은 시기에 핀다. 그렇다고 숙근식물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더위가 아주 기승을 부릴 무렵이면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다. 꽃이 안 피는 것은 물론이고 식물 자체가 녹아 버린 듯이 사라진다.

꽃으로 피어난 뒤에도 양귀비는 변신을 멈추지 않는다. 보통의 다른 꽃들은 봉오리를 열고 만개한 뒤에는 벌과 나비들에게 자신을 맡긴 채로 마치 운명에 복종이라도 하듯이, 그 어떠한 숙명이라도 달게 마땅히 받아들인다는 듯이 잠자코 있다가 때가 되면 꽃잎을 떨어뜨리거나 시들어 가거나 하지만 양귀비는 여느 꽃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갑옷 같은 뚜껑을 떨어뜨리고 만개한 뒤부터 양귀비는 더욱 바빠진다. 많지도 않은 달랑 네 장의 꽃잎을 최대한 활용한다. 자신의 몸으로 무엇을 얼마나 연출해 보일 수 있는지 실험을 한다고나 할까. 주름이 오글오글한 깔때기 모양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훈련이 아주 높은 무용수가 떠오른다. 자신의 몸으로 나비를 만들기도 하고 유유히 흐르는 깊은 강을 연출해 내기도 하는 그런 무용수 말이다.



양귀비는 그 형태가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래서 단순한 양귀비는 차라리 풍성하다. 꽃잎 하나하나를 뜯어놓고 보면 도무지 풍성해야 할 까닭이 없는데 풍성하다. 해부학적인 관찰로는 양귀비를 알 수 없다. 어림도 없다. 그야말로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변신의 끝은 너무도 장엄하고 화려하다. 23살 쯤에 요절한 천재 예술가를 닮았다고나 할까. 양귀비는 굳이 인간의 사이클로 말하자면 유,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만 있고 중년기와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가 없다. 적어도 꽃으로만 보자면 그렇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도 있지만 양귀비는 그것조차도 거부한다. 열흘은커녕 사흘도 안 간다. 사흘은커녕 어떤 경우 단 하룻만에,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면 벌써 미련 없다는 듯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화려한 자태 그대로 네 장의 꽃잎을 하나씩 툭, 툭, 던져버리듯이 떨군 채로 금방 씨방만 남게 되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소녀들이 일기장이나 아주 친한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말로 나는 몇 살까지만, 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를테면 스물 몇 살까지만 사람으로 살겠다는, 그 뒤에는 타락이 오기 전에 스스로 죽거나 죽음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각오를, 맹세를 일기장에 남몰래 써놓고 우주의 거대한 비밀이라도 간직한 듯이 기성세대의 불의한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철조망을 뛰어넘는 청년들의 펄펄 끓는 피와 양귀비의 한 살이는 너무도 닮았다.

이런 보석(?) 같은 글들이 그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나와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 여인 가운데 한 여인이 이 땅을 떠나게 되면서 양귀비회 자체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그 뒤로 3년, 아직도 새로운 양귀비회는 태동을 못하고 있지만, 사람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꽃들은 잘도 피고 잘도 진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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