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의 삶의 향기 폴폴> 장마 속 단상

연꽃을 바라보며

눈을 뜨게 만든 것은 빗소리였다. 창가에 부딪치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그동안 장마라고 하였지만 비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내리는 비를 바라보니 시원하다. 가슴을 막고 있던 그 무엇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어렵다. 발길 닿는 대로 그 어디라도 무작정 걸어가고 싶다. 그런 나를 잡는 것은 현실이다. 집사람의 눈이 제일 무섭다. 방황하는 병이 다시 도진다면 힐난한다.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빗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면서 덕진 연못으로 향하였다. 연꽃 축제가 열린다고 하였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그 곳을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날이 좋았다면 축제에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이 싫어졌다. 사람들이 없는 곳이 외로워 싫었던 때가 있었다. 두려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 싫었다. 그런데 달라졌다. 조용하고 한가한 곳이 좋아졌다.

비 내리는 취향정. 취향정은 덕진공원의 옛 이름이다. 이제는 아스라해졌다. 대학 시절이 전설이 되었다. 나의 행적이 분명하였지만 그 것이 진짜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기억이 희미하다. 그 때에는 무서운 것도 없었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가진 것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열정이 넘쳐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 때보다는 무엇이든 더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연못을 가득 메운 연잎들 사이로 연분홍 꽃들이 웃고 있다.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어 그 청초함을 더욱 더 자랑하고 있다. 꽃 이파리 몇 개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어 더욱 더 아름답다. 꽃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뒤에서 손짓을 하고 있기도 하고 아예 우뚝 솟아올라 함박웃음을 짓고 있기도 하다. 운치란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사가 떠오른다. 700년 전의 연씨가 발아하여 올해 드디어 꽃을 피웠다고 하였다. 분홍빛을 하고 있는 연꽃의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가 생각난다. 신문에서 본 연꽃의 모습과 어찌도 그렇게 닮아 있는지, 묘한 기분이 되었다. 물론 덕진 연못에 피어난 연꽃은 700년 전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700년 전의 연꽃의 모습과 바라보고 있는 연꽃의 모습은 다른 것이 없었다. 700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으면 그 본질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를 것이다. 누구는 이름을 세상에 날리고 싶어 하고 누구는 행복해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목적은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점도 있다. 700년 전의 꽃이나 지금의 꽃이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분명히 그 존재 이유는 있다. 존재 이유가 있기에 험난한 세상이지만, 그 것을 극복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살아야 이유가 없다면 고난의 연속인 삶을 유지해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마다 살아야 할 이유는 모두 다 다를지라도 살아가야 할 목적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에 험난한 파고를 이겨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보면 연꽃처럼 예쁜 꽃을 피워낼 수 있다. 오늘을 성실하게 채워가게 된다면 추구하는 삶의 목적도 자연스럽게 달성할 수 있다. 삶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행복해질 수 있고 이름도 날릴 수 있다.




빗속에서 함초롬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는 연꽃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게 여유를 즐길 수 있기에 세상은 살아 갈만 하다. 고통만이 연속된다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연꽃의 곱게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를 맞으면서도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내 삶도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우뚝 설 수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연꽃이 참 곱다.


부들과 게으름

핫도그처럼 생긴 부들 꽃이 피었다. 먹음직스럽게 피어 있는 모습이 싱그럽다. 부들을 바라보면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부들이 만약 이곳에 있지 않고 들판이나 산위에 있다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못이 아닌 곳에 부들이 서 있다면 주변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우뚝하고 돋보인다.




부들도 그렇지만 살아 있는 생물체이든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든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세상이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인다. 구족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있게 된다면 그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고 구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부들은 연못에 있어야 한다. 연못에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이 된다. 제자리를 잡아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없어야 할 곳에서 서성거리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게으름이라고 한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부른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만이 게으른 것은 아니다. 노력하여 배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다면 그 또한 게으른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 또한 게으른 사람이고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 또한 게으른 사람이다. 마땅히 이루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게으른 사람이다.


부들을 보면서 나를 들여다본다. 부들처럼 제 자리에 위치하면서 역할을 다 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무엇 하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없다. 다섯 가지 기준을 적용해 보았을 때 기준을 넘어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분명 게으른 사람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였지만, 그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객관적인 기준에 의한 판단이 되지 못하였다. 어찌 그런 삶을 살아왔는지 후회가 앞선다.


그 동안 너무 안이하게 살아왔다. 게으름도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식적인 수준에서 신체를 기준으로 생각하였다. 열심히 움직이고 행동함으로서 게으르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게 되면 결국 우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게 된다.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할 뿐이다.





살아오면서 경험하였던 수많은 근심과 걱정들이 되살아난다.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근심과 걱정을 해결할 수는 없다.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바르게 관조하게 되면 근심과 걱정은 결국 햇살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다. 지혜로운 마음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고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게으름에서 벗어나 열심히 노력하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


부들이 싱그럽다. 부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게으름부터 털어버려야 한다. 게으름을 털어버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혜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지혜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무슨 일이든 극복할 수 있다.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부들이 아름답다.


우보만리(牛步萬里)

세상에 그 어떤 보석이 이보다 더 빛날 수 있을까?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찬란하다. 비록 순간의 아름다움이기는 하지만,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뚝하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뿐만 아니라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이 참으로 곱다. 초록의 이파리 끝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은, 물방울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는 보석이다. 한참 동안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물방울 보석에 잡혀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잡아버린 물방울 보석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감탄사만을 연발하는 일뿐이다.




사람들은 물방울 보석과 다이아몬드를 놓고 선택하라고 하면 모두 다이아몬드를 선택할 것이다. 물방울은 액체로서 금방 사라지지만, 다이아몬드는 고체로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물방울 보석은 금전적 가치가 전혀 없는데 반해 다이아몬드는 경제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를 선택한 건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 만약에 물방울 보석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 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상식이고 순리이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아무리 영롱하고 반짝거려도 보석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면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아침 이슬은 해님이 얼굴을 내밀게 되면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쉽게 사라져버리니, 보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방울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 물방울 자체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물방울을 아름답다고 감탄을 한다. 그렇지만 다이아몬드와 비교하게 되면 물방울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만다.


우보만리(牛步萬里). 소걸음으로 만리를 간다는 말이다. 소는 말에 비해 현저하게 느리게 걷는다.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소를 보면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다. 스피디한 세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의 느린 행동을 참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게 된다. 그러나 느릿느릿 걷고 있는 소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 스피드를 즐기면서 빨리빨리 행동한다고 하여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불행해진다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식물은 움직이게 되면 죽는다. 반대로 동물은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특성에 따라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란다. 상대방이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행동하기를 강요한다면 그 것은 상대방보고 죽으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대방은 나와 같지도 않고 또 같아서도 안 된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와 같다면 세상 살맛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기에 나의 삶의 가치가 커진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내 생각이 더욱 더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물방울의 가치를 상실시키는 것은 짧은 시간이다.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고체로서 오랜 시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보만리의 생각으로 접근해보자. 시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다이아몬드 또한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자. 그렇다면 물방울과 다이아몬드의 차이가 무엇인가? 시간의 길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때 물방울의 영롱함과 다이아몬드의 영롱함을 비교하게 되면 당연 물방울이 더욱 더 돋보인다. 초록 이파리 끝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물방울을 바라보면서 내 삶을 들여다본다. 다이아몬드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물방울처럼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예욕도 욕심도 모두 다 허망한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닌가? 행복이란 물방울처럼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정기상 님은 전북 완주 가천초등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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