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자동차 사고-1회


#노란 백합

자전거 사고는 더러 당하기도 하고 내 보기도 했지만 자동차 사고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사고 직후의 느낌이 아주 묘했다. 이팔청춘의 시기에 딱 한 번 피워본 대마초가 생각났다. 내가 나인 줄은 알겠는데 어디에 있는지, 공중에 떠 있는지 지하 3000미터 정도의 무슨 동굴에 있는지 영 모르겠다는 느낌, 사고 직후의 기분이 꼭 그와 같았다.

대마초는 내 나이 16세 때의 경험이었다. 그 해의 어느 날 갈 곳은 없고 오라는 데도 없는 채로 서울특별시 거리를 방황하던 내 눈에 구인광고 하나가 들어왔다. 전봇대에 붙여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월수 100만원 이상 보장’이라는 붉은 글씨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한참 뒤에야 전화번호가 보이고 상호가 보인 그런 광고였다. 시내버스 요금이 5원이던가 하던 시절이었다. 월수 100만원 이상이 도대체 얼마인지 계산조차도 잘 안 되었다.


#루드베키아


서울에서는 눈 뜨고 코를 잃는다고 하지만 속아본 경험이 없는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바야흐로 돈벼락을 맞는구나 하는 부푼 가슴을 안고 찾아간 곳은 룸살롱이었다. 룸살롱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던 내게 그곳은 완전히 별세계였다. 천국도 그런 천국이 있을까 싶었다. 대낮인데도 예쁜 누나들이 속옷 차림으로 왔다갔다 해서 약간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곳에서 보조라는 것을 하기로 했다. 웨이터 보조, 주방 보조, 뭐 그런 것이었다.

술 취한 손님의 주머니라도 몰래 털지 않는 한 월수 100만원은커녕 100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갈 즈음의 어느 날 기자라는 남자 하나가 어디서 1차를 하고 2차를 한다고 들렀다. 단골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일로 기분이 몹시 우울했고, 들어서자마자 무대 위로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몸짓과 표정이 흡사 실연당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무슨 영화라도 보는 것 같았다.



#보라색 도라지꽃도 넣고...

예쁜 누나들이 그 기자라는 남자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기자는 한 명도 거절하지 않고 오는 대로 자신의 룸으로 끌어들여 앉혔다. 누나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애교를 동원해서 매상을 최고치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녀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오빠 양주 하나만 더” “오빠 과일안주 하나만 응?”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문한 안주와 술을 그녀들은 입에 넣는 척하며 떨어뜨리고, 술잔에 따르는 척하면서 엎지르고, 이렇게 저렇게 온갖 방법으로 버리고, 또 버리는 것이었다. 보조들은 누나들이 버린 안주가 발에 밟히지 않도록 남몰래 치우느라 바쁘고, 커튼 사이로 슬쩍 내미는 양주병을 받아들고 빈 양주병을 쥐어주느라 또 바빴다.


#분홍 글라디올로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11시 30분 즈음에 영업부장은 영업종료를 알렸다. 그리고 잠시 뒤에 실내의 모든 등을 환하게 밝혔다. 그 사이에 누나들은 기자라는 남자가 돈이 한 푼도 없는 완전한 ‘개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배인과 영업부장 그리고 담당 웨이터가 ‘개털 기자’를 취조(?)하는 동안 누나들은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오늘 완전히 공쳤다”는 둥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짜 기자는 아니었다. 집도 성북동 어디의 꽤나 부자촌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신문사와 집으로 전화를 해서 그 사실을 알아낸 지배인과 영업부장은 퇴근을 했다. 술값을 받아야 할 웨이터와 팁을 받아야 할 누나들 그리고 보조들이 그를 인질로 잡고 통행금지 해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또 술을 마셨다.

“야 나 화장실 간다. 네가 따라와.”


#연두색 글라디올로스

그가 나를 지목했다. 손님이 화장실을 갈 때 뒤따라가서 서비스를 하는 것은 보조들의 몫이었다. 서비스를 잘하면 팁이 있고, 못하면 꿀밤을 맞는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서비스를 받겠다는 생각으로 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내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귀에 대고 이런 말을 했다.

“너 인마, 미성년자지? 이런 데 있으면 안 돼. 내일 당장 집으로 가 인마, 집에 가서 이거나 피워봐. 이거 대마초거든.”

그러는 것이었다. 대마초가 무엇인 줄은 몰라도 그것 때문에 망한 가수와 배우들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나한테 주나? 겁이 더럭 났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버리기는커녕 누가 알면 큰일 난다는 생각으로 주방 한쪽 길은 곳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월수 100만원은커녕 100원도 안 되는 그곳을 몰래 빠져나와 시골로 갔다.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고향행 기차를 탄 것은 아니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그놈의 대마초를 반드시 한 번은 피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다.

서울에서는 은밀한 장소 하나 찾아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지만 시골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런 친구 저런 친구 온갖 친구들 중에서도 믿을 만한(?) 녀석들로 몇 명을 골라서 이른바 대마초 파티를 열기로 했다. 둘레둘레 모여앉아 담배 크기로 대마초를 말아놓고 일제히 불을 당겨 동시에 빨아들였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거의 동시에 이성을 잃어버렸을 것이었다. 담배도 아직 제대로 피울 줄을 모르는 녀석들이었다. 대마초는 담배에 비해 적어도 100배는 강력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대밭에서 죽순 찾기

깨어난 뒤의 느낌은 뭐랄까, 정신이 완전히 찢어져 버렸다는, 영혼이 걸레가 되어 버렸다는 그런 것이었다. 여기에 무슨 천국이 있단 말인가? 인사불성이 되어 벌벌 기어다니는 것이 천국이라면 그런 천국은 싫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도 할 일을 다 못하는데 그런 죽은 정신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완전히 배반당한 기분인 채로 남은 대마초를 버리기로 했다. 한 녀석이 자기가 버린다고 가져갔지만 실제로 버렸는지 여부는 나중에도 묻지 않았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던 것이다. 파울로 코엘로는 젊은 시절 마약사범으로 세 번이나 붙잡혔다고 하지만 우리는 역시 우리일 뿐이었다.

그 뒤로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생애 처음으로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 순간 그때의 일이 마치 어제나 그제쯤 있었던 것처럼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가 나인 줄은 알겠는데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찢겨진 정신,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영혼으로 우두커니 앉아서 눈이나 겨우 깜빡거리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대마초에 취해 벌벌 기던 그때의 일이 마치 수면 위로 부상하는 고래처럼 떠올라왔다.


#노부부의 양만장

그날의 사고는 사실 예정된 것이기도 했다. 바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경구를 늘 가슴에 담고 살면서도 막상 그 순간이 오면 다 잊어버린다. 오후 3시에 약속이 있었다. 칠십대의 노부부가 장어와 향어를 키우는 양만장을 관리하며 그림처럼 살고 있었다. 사모님의 말씀이 재미있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촌놈이 서울의 지리는 어찌 그리도 소상히 알고 있는지 놀랍고 신기했다’고, 그래서 반했고, 그래서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남자의 성격이 좋아서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서울 지리를 잘 안다는 이유로 반해서 결혼했다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었다. 이 낯선 이야기가 나를 휘어잡았던가. 좀 더 듣고 싶었다. 살아온 이야기를, 슬펐던 이야기를, 기쁘고 억울하고 신산했던 모든 이야기를 욕심껏 들어보고 싶었다. 꽃다발도 하나 준비했다. 마당에서 이제 막 피어나는 글라디올로스와 백합 그리고 도라지와 루드베키아 등등을 서너 송이씩 꺾어서 내 딴에는 예쁜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머니의 주문이 많았다. 중증치매 진단을 받고 2년을 넘어 3년차인 어머니는 전깃불을 켜고 끄지도 못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끄지도 못하셨다. 다행히도 화장실 출입은 혼자서도 가능했다. 때문에 외출 시에는 혹시 늦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텔레비전과 전깃불을 켜고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당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느닷없이 죽순을 꺾어오라시는 거였다.

“뭔 죽순을?”

“아 죽순 삶아서 말려야제.”

전에 없던 주문이었다. 죽순이 한참 올라오는 시기이기는 했다. 시간은 이미 2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20여분을 잡아야 했다. 10분 동안 죽순을 꺾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만 20분이 넘게 걸렸다. 어른들과의 약속은 적어도 10분 이상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고수해온 내게 이것은 하나의 이변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주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구니를 가져오라, 칼이 잘 안 든다, 계속되는 어머니의 주문 앞에서 약속시간은 이제 겨우 10분밖에 안 남고 말았다.


#흉기로 달려든 전봇대

야아 이거 큰일났다,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둘러 시동을 걸고 마당을 나섰다. 내리닫이 동네길을 80여미터나 내려왔을까. 그때 문득 안전벨트를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전벨트 생명벨트라는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달리면서 벨트를 매려고 하는데 이게 잘 안 들어갔다. 야 너 왜 이래. 버럭 짜증을 내며 고개를 숙이고 마침내 끼웠다 싶은 순간 하늘에서 전봇대가 퍽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무엇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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